칼럼니스트 2003년 6월 16일 No. 775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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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섭의 세상 엿보기(14)
'상자 속의 사나이'

대학 시간강사들을 흔히 '보따리 장사'라고 한다. 이 대학 저 대학으로 옮겨다니며 지식을 판다고하여 붙여진 별칭이다. 전국을 누비며 강의를 한다고 해서 '국토순례자,' 부인에게 생계를 기댄다 하여 '등처가'라는 자조 섞인 푸념을 하는가하면, 열악한 여건을 감수하는 '캠퍼스의 노예'라는 소리도 듣는다.

자신을 '상자 속의 사나이'라고 규정한 한 시간강사가 생계비를 걱정하는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사학위를 받고 국립대 시간강사와 연구원자리를 얻었으나 교수 임용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자 대학교수의 꿈을 영원히 접었다. 오죽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안타깝지만 자신이 선택한 학문의 길을 포기하고 가족들을 팽개친 것은 무책임하다.

시간강사는 전국적으로 6만여명에 이르고, 대학강의의 37%(교양 54.8%, 전공 30.6%)를 담당하고 있으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상황은 전임교수와는 하늘과 땅 차이다. 초임 전임강사가 연봉 3000만원을 받는 것과 비교하면 시간강사는 그 3분의 1∼5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올 들어 연세대가 강사료를 시간당 3만원에서 4만으로 올린 것이 국내 최고 수준이다. 국립대는 시간당 3만9000원으로 주당 6학점을 강의할 경우 월 평균 94만원을 받는다. 사립대는 1만5000원∼3만5000원선으로 월 평균 36만∼84만원에 불과하다. 교통비 등을 빼고 나면 남는 게 없을 뿐 아니라 다음 학기에 강의를 맡을 수 있을 지도 늘 불안하다. 대학 당국은 인건비 절감의 효과적 수단으로 강사들을 이용할 뿐, 그들이 미래의 교육과 연구의 담당세력이라는 점은 외면하고 있다.

시간강사의 신분도 법률상 '일용 잡급직'으로 규정돼 방학에는 전혀 강사료를 받지 못한다. 국민건강보호법, 고용보호법, 국민연금법 가입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교육법상의 교원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신분이다. 생계에 쪼들리다 보니 번역 등 부업을 할 수밖에 없고 연구 소홀로 대학교육의 질 향상도 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다.

많은 투자로 길러낸 시간강사들의 지적 자산이 사장되지 않고 또 다른 불행을 막기 위해서라도 불안정한 신분과 열악한 처우문제 개선이 절실하다. 교육 당국은 내년부터 시간강사를 계약제근로자로 격상시켜 고정급을 주고, 각종 보험혜택도 받게 하며 시간강사의 명칭을 대학강사로 바꾸는 방안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처우개선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이미 형성돼 있는 데다, 대선 공약이어서 실현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만 비용조달이 어렵고 사립대학의 반발이 걸림돌이다.

박사학위를 갖고도 교수로 임용되지 않으면 학문적 활동이 불가능한 시간강사는 자살을 선택한 그의 표현처럼 '상자 속의 사나이' 일 수밖에 없다. '내 보따리 속에는 반짝이는 꿈들이 수없이 서걱이고 있다'는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시간강사들의 반짝이는 꿈★은 언제쯤 이루어 질 것인가.

- 담배인삼신문 2003.06.13

이규섭

여행작가·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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