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6월 4일 No. 767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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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가 만난 영화제 사람들(4)>
아시아 영화의 광팬, 토니 레인즈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Tony Ryns)에게는 'Frying for Asia' 또는 'Crazy for Asia'라는 별명이 따른다. 그만큼 그는 아시아영화에 미쳐있고, 일년의 절반을 아시아에서 보낸다.

나는 1988년 여름 박기용 감독의 소개로 토니 레인즈를 처음 만났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그를 박기용 감독이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부임한지 얼마 안된 나에게 소개해 준 것이다. 당시 박기용은 서울예전과 영화진흥공사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영화감독 지망생이었다. 지금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원장을 맡고 있고 <모텔선인장>과 <낙타(들)>로 세계영화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젊은 감독이지만...

또 박기용은 어린 시절을 영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영어가 능통해서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영화인들을 거의 도맡다시피 안내하고 다녔고, 집에서 재우기도 하는, 이를테면 자원봉사 통역원 시절이었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토니 레인즈는 박기용 감독의 안내로 임권택 박광수 감독과 자주 만났고 우리들은 주로 충무로의 밥집이나 포장마차를 전전하면서 밤늦도록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1980년대 초, 상하이에 갔을 때 시장에서, 그것도 밝은 대낮에 개고기를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보신탕집에서 개고기를 먹었는데 그 엽기적인 현장을 100여명의 관중이 둘러서서 신기한 듯 구경했다고 한다. 좀 과장은 있었겠지만...

그후 토니 레인즈는 1년에 한 두 번 한국을 방문했고, 내가 영화진흥공사를 떠난 후에도 그가 한국에 오면 으레 점심이나 저녁을 함께 했다.

1993년에는 한국영화주간을 마련하기 위해 함께 방한한 영국현대예술원의 영화책임자인 사이먼 필드( Simon Field-지금은 로테르담 영화제 집행위원장)를 나에게 소개해 줌으로써 후일 절친한 친구가 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처럼 그와의 친교는 해가 갈수록 깊어졌다.

그러나 토니 레인즈와의 만남은 1995년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의 창설 준비를 하면서 잦아졌다. 그 당시 국제영화제에 대한 전문가나 영화제를 직접 운영해 본 경험자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국제영화제 창설을 추진하는 우리들로서는 그에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토니 레인즈는 홍콩국제영화제의 창설에 직접 관여한 바 있고 또 캐나다 뱅쿠버 국제영화제의 아시아영화 선정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도움은 컸었다. 지금도 뱅쿠버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준비하면서 국제영화제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전혀 없었던 부산광역시의 시장과 부시장, 국장 등 부산시 공무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1995년 12월 말, 한국을 방문한 그를 부산에 데려가기도 했고, 1995년 1월 1일에는 우리 집에서 박광수,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 오석근 등 창설요원과 함께 영화제의 골격을 짜기도 했다.

그해 2월 부산국제영화제의 조직위원회가 정식 출범하면서 우리는 토니 레인즈를 페스티벌 어드바이저(자문위원)로 정식 위촉했다. 6월초에는 부산에서 국제영화제에 관한 국제세미나를 개최했다. 연사로 토니 레인즈를 초청했음은 물론이다.

이 세미나에는 두 명의 특별한 연사를 초대했다. 그 중 한 명은 때마침 부산영화제가 모델로 삼아야 했던 홍콩 국제영화제의 아시아 담당 프로그래머로 있던 '웡 아잉린'(Wong Aing-Lin)이란 여자다. 홍콩이 중국으로 넘어가기 직전인 그 해 4월에 개최된 홍콩영화제에 웡 아잉린이 선정했던 영화가 중국정부와 갈등을 빚어 영화제가 끝난 후 중국정부의 압력으로 해임되자 우리는 즉시 프랑스 박사학위 소유자며 오랫동안 아시아영화 전문가로 일했던 그녀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했었고 세미나에도 주제발표자로 초청했다.

또 한 명은 폴 리(Paul Yi). 재미교포 2세이며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아시아 아메리카 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있던 그를 초청해서 '국제영화제는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발표하도록 부탁했다. 세미나가 끝난 후 나는 우리말을 거의 못하는 그를 여러 차례 술자리를 마련하면서 부산영화제에서 일하도록 설득했다. 제1회 부산영화제가 폐막한 다음에야 그는 미국에 귀국할 수 있었다.

영화제 준비과정에서 토니 레인즈의 역할이 매우 컸음은 물론이다. 토니 레인즈는 수재다. 1948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출생하여 캠브리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시절 몇 편의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한 아시아영화의 전문가이며, 대만의 거장감독인 후샤오시엔, 양덕창, 챠이밍량과 일본감독 키타노 다케시, 그리고 중국의 5세대 감독들을 서방에 소개하는데도 그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수재인 만큼 국제영화계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같은 영국 평론가이며 오랜 기간 국제영화평론가협회 회장을 맡았던 데렉 말콤(Derek Malcom)은 토니 레인즈를 비하하는데 앞장선다.

마르코 뮐러(Marco Muller)도 그 중의 하나다.영화제준비가 한창이던 1996년 여름, 네덜란드 로테르담 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재직하다가 스위스의 로카르노 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마르코 뮐러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와 친척인 주한 스위스 대사관 문정관 집에서 저녁모임이 있었다.스위스 대사부부와 김치곤 메세나 사무처장 그리고 나만 초청된 가족모임이었는데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마르코 뮐러에게 영화제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의 도움과 참석을 요청했고 그는 쾌히 승낙했다. 그러다가 나는 무심결에 토니 레인즈가 우리 영화제 창설을 돕고있다는 말을 했다. 내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안색이 변하면서 즉각 '그러면 함께 잘해 보라'고 하면서 더는 영화제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중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할 만큼 중국영화의 전문가였고 토니 레인즈를 키웠는데 그의 자리를 토니 레인즈에게 물려주게 된 데 대한 반목이라고 하지만 그런 관계를 모르고 있었던 것.

키가 크고 뚱뚱한 토니는 체구와는 달리 어떤 때는 여자처럼 여린 마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와의 교제에도 항상 작은 부분까지 신경을 써야한다.

영화제의 자문위원으로 위촉했기 때문에 그에게 소정의 자문료를 지급하고 있다. 2-3년이 지난 어느 날 해외영화제에서 만난 그가 외면하는 일이 있었다. 당황한 나는 그 이유를 추적했다. 원인은 우리가 그에게 자문료를 주면서 별로 자문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본인에게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데에서 발단된 것.그 오해를 푸는 데에도 1년은 넘게 소요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작년 7월, 토니 레인즈, 로테르담 영화제 사이먼 필드 그리고 프랑스 여자 평론가와 함께 미국 시애틀 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했을 때의 일화. 영화제측에서 제공해준 차로 이동하던 중 무심코 내가 앞자리에 앉고 사이먼과 프랑스 평론가와 토니가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막 차에 타려던 토니가 문을 쾅 닫고 걸어가 버린다. 당황한 나는 사이먼에게 내가 잘못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만났을 때도 본 척도 않는다. 심지어 아침을 먹다가 토하기까지 한다. 같이 있던 사이먼에게 나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해도 그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날 저녁 영화를 함께 영화를 보기 전에 외면하고 있는 토니에게 나 때문에 화가 난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답변하면서 체구가 큰 두 사람과 여자를 뒷자리에 타도록 하고 혼자 앞에 타는 것은 'selfish' 한 것 아니냐고 따진다. 원인을 짐작하고 있었던 나는 즉시 잘못했다고 사과했다. 그의 화는 다음날 심사할 때까지도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헤어질 때에야 좀 풀렸다가 부천영화제에서 만나 완전히 풀어졌다. 그런 토니다.

그는 영화제도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하다. 칸 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는 싫어한다. 두 영화제에서 그의 모습은 볼 수 없다.싱가포르 영화제도 외면하는 영화제다.그러나 홍콩영화제는 한해도 빠짐없이 참가하고 로테르담 영화제에서는 항상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그가 처음 방문했던 1988년 이후 한국에는 일년에도 여러 차례 방문한다. 영화연출에도 손을 대기 시작, 중국영화(1983), 필리핀영화(1983), 신중국영화(1989)에 이어 2001년에는 장선우변주곡을 연출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해외영화제에 출품되는 우리 영화의 영문자막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영화가 거의 없을 정도다. 그만큼 토니 레인즈는 한국영화를 해외에 알리는 데에 엄청난 공헌을 해왔고 지금도 그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아시아 영화를 위해 밤낮없이 하늘을 날고 있는 토니 레인즈. 아시아영화에 미친 아시아 영화광 토니 레인즈, 나는 그가 오랜 친구이면서 만날 때마다 한편으로 조심하면서 함께 술을 마신다.

- '프리미어' 6월호 (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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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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