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5월 25일 No. 758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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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가족의 이중주

삼국시대부터 전해내려 온 생황은 독특한 악기다. 국악기 중에 두 가지 이상의 음을 동시에 낼 수 있는 유일한 악기로 이를 쌍성주법(雙聲奏法)이라 한다. 단소와의 이중주에 많이 쓰인다. 이중주는 같은 종류의 두 악기로 연주하는 곡도 있지만,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바이올린과 플루트, 플루트와 피아노처럼 서로 다른 두 악기로 절묘한 화음을 내는 이중주도 있다.

CEO나 직장인들도 생황처럼 두 가지 이상의 소리를 동시에 낼 수 있거나, 이중주의 화음같이 일과 가족을 조화롭게 아우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정의 달 오월에 되돌아 본 우리 가정의 모습은 양극단에 치우쳐 불협화음을 낸다. 부유한 환경 속에서 과보호를 받는 어린이가 있는가하면,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부모들의 무관심 속에 내버려진 아이들도 있다. 가정해체도 급증하고 있다. 아이들의 심성(心性)은 벼와 같다. 가정이란 못자리에서 움이 터 학교에서 가지를 쳐서 사회에서 여물어 간다. 그러나 흔들리는 가정이 늘고, 교육이 불신 받고, 사회환경의 혼탁으로 '꿈나무들'의 성장 여건은 갈수록 황폐화되고 있어 안타깝다.

CEO나 직장인들도 일과 가족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는 것도 가정의 달 오월이다. 일에 몰두하면 가정에 소홀하고, 가정에 신경 쓰다보면 일에 소홀해지기 쉽다. 회사에서 유능한 CEO나 직장인은 무능한 남편이 되고, 무관심한 아버지취급을 받게되는 데 고민이 따른다.

성실한 가장과 좋은 가장이 동시에 된다는 것이 한국의 실정에서는 참으로 어렵다.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결과 가장과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은 하루에 고작 78분이며 이중 40분은 가족과 묵묵히 밥을 먹는 식사시간이다. 한국인의 생활이 기본적인 생계유지와 교육 등 사회적 영역에 집중되고 있으며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거의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노동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는 지독한 일 벌레였다. 새벽에 출근하여 퇴근조차 꺼릴 정도로 일에 묻혀 살았다. 가족들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무늬만 가족'임을 발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가족과 함께 하기 위해 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의 아내는 계속 일을 나갔고, 아이들은 아이들마다 바빴다. 가족들에게 철저하게 왕따 당한 그는 '나 홀로 생활'로 전락했다.

남의 일이 아니다. 아내는 쉬고 있는 남편 보다 돈 버는 남편이기를 바란다. 아이들도 집에서 노는 아빠 보다 회사에 나가는 아빠를 더 좋아한다. 가족을 위하려다가 가족으로부터 따돌림당하기 쉬운 것이 가장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출세란 무엇이고, 성공한 삶이란 무엇인가" 자문하며 서글픔에 빠진다. 일에 몰두하는 것은 가족을 위한 희생이라고 변명하지만 착각일 뿐, 가족은 가장을 '돈 버는 기계' 정도로 여긴다.

파김치가 된 몸으로 밤늦게 귀가하면 가족들이 낯선 타인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는 것이 중년 직장인들의 한결같은 호소다. 푸석푸석한 얼굴로 현관문을 열어주는 아내, 자식들은 잠자리에 들었거나 잠이 들지 않았더라도 꾸벅 인사만 한 뒤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쫓기듯 되풀이되는 일상 속에 삶의 여유를 찾기가 어렵다. 특히 CEO들은 조직을 관리하고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숨가쁘게 뛴다. 주말이면 비즈니스를 위해 골프가방을 들고 나간다. 가족은 멀어지고 불협화음은 소음이 되어 삐걱거린다.

더 늦기 전에 '일과 가족을 위한 이중주'를 연주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가족과 함께 있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늦었다. 자신과 가족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 순위다. 기계도 무리하게 사용하면 쉽게 마모된다. 기름을 치고 정비하듯 시간을 안배하여 자기관리를 해야한다.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으면 가족을 돌볼 시간은 나오지 않는다.

자유시간을 확보하면 삶의 여유가 생긴다. 혼자서 훌쩍 여행을 떠나거나 등산이나 낚시를 해도 좋다. 봉사활동을 통해 나눔의 시간을 마련한다면 보람은 배가될 것이다. 주 5일 근무제를 활용하여 한 달에 한 두 번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나거나 음악회를 가거나 전람회를 둘러보면 피폐해진 가족관계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가정이 화목해야 일에 더욱 몰두할 수 있다. 일과 가족의 화음은 행복의 선율이다.

- CEO Report 5월 15일 (2003.05)

이규섭

여행작가·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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