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5월 6일 No. 741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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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다리 걸치는 부유층 '투자 이민'

얼마 전 신문사에 함께 근무했던 후배의 연락을 받고 만났더니, 뜸 금 없이 미국으로 떠난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캐나다 이민허가를 받아놓은 상태라고 한다. 미국에서 해외생활을 익힌 뒤 캐나다로 떠나겠다는 것이다. 속사정은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지만 왜 한국을 떠나려는 것인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두 자녀 중 한 명은 대학을 졸업했고, 한 명은 대학에 다니고 있으니 자식 교육문제로 떠나는 것도 아니다. 중견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대기업 홍보이사를 지냈으니 생활이 곤궁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하려 떠나는 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결국 불안한 한국의 정세와 보장되지 않는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 떠나는 것으로 지레 짐작한다.

개인적으로 이민은 떠나고 싶지 않다. 눈에 익은 아름다운 산하에서 모국어를 쓰며 살다가 고향에 묻히거나 한 줌 재가 되어 산하에 뿌려지고 싶다. 울화통을 치밀게 하는 현대사의 격랑을 헤치고 살아왔지만 그래도 필자는 한국이 좋고 자랑스럽다.

한국이민 역사는 올해가 100주년이다. 1903년 1월 13일, 한인 102명이 미국 증기선 게일릭호를 타고 20여일의 항해 끝에 하와이에 도착했다. 미주 한인 이민사의 첫걸음이다. 가난한 조국을 등지고 이역으로 떠난 이들은 사탕수수밭에서의 고된 노동 속에 고국의 '사진신부'를 맞아 외로움을 이겨내며,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었다. 나이 든 남편들은 어린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근면성실로써 갚았고, 부인들은 자식교육에 앞장서 2·3세들이 성공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민 대상국도 몰타 등 휴양지로

지난 한 세기 동안 온갖 역경을 딛고 미국사회에 뿌리내린 '한국을 빛낸 영웅'들은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하와이주 대법원장인 로널드 문(한국명 문대양), 6·25 때 하우스보이 출신으로 입양됐다가 1998년 워싱턴주 상원 의원으로 당선된 신호범(미국 명 폴 신), 캘리포니아주 첫 한인 여성 판사인 태미 류, CNN 메인 앵커 소피아 최, 새크라멘토 유니언지(紙) 기자 이경원, 미 육군 예비역 대령 김영옥씨 등은 '인간 승리'의 표상들로 우리의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

광복 이후 1960년대 전까지 전쟁 고아가 해외 입양되거나 주한미군과 국제 결혼한 여성들이 출국하는 경우 등을 제외하고 하와이 이민처럼 대규모 이민은 없었다. 60년대 들어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로 농업이민을 떠나고 간호사와 광원들이 외화 벌이와 일자리를 찾아 유럽 등지로 가면서 본격적인 집단 이민시대가 열렸다. 특히 60년대 후반까지 서독으로 간 간호사·광원은 1만여명에 이르렀다. 미국 자유이민이 허용된 1967년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태평양을 건넜다.

70년대 중반부터 주춤하던 이민은 1982년 캐나다가 투자이민을 허용하면서 다시 활기를 띠게 됐고 캐나다가 주요 이민 대상국으로 떠올랐다. 이에 자극 받은 뉴질랜드·호주 등이 투자 이민의 문호를 열면서 한국인들의 해외이민은 전성기를 맞았다. 이제는 선진국 위주의 이민에서 벗어나 피지·에콰도르·몰타 등 휴양지가 새로운 이민지로 부상하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에는 고국의 발전상을 보고 영주 귀국하는 역(逆)이민 현상도 생겨났다. 90년대 들어서는 자녀를 좋은 환경에서 키우기 위한 교육이민이 늘었다. 조기유학 붐을 타고 자녀와 부인을 이민 보내고 자신은 홀로 국내에 남는 '기러기 아빠'들이 많았다.

요즘은 국내에 재산과 근거지를 놔둔 채 외국 현지에 새로 생활 근거를 마련하는 '이중생활형'이민이 부쩍 늘고 있다니 예삿일이 아니다. 자녀 교육이나 쾌적한 환경 같은 전통적인 이유 외에 새 정부 들어 부(富)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북한 핵 위기, 경제난이 심화되면서 나타나는 'Bye 코리아' 증후군으로 '양다리 걸치기 식' 투자이민이다. 해외이주 신청자는 지난해 12월 720명에서 올 2월에는 926명으로 증가 추세다.

20대 10명 중 6명 "이민 가겠다"

이민 층도 중산층에서 상류층으로, 연령도 청·중년층에서 장년층으로 옮겨가고 있으며 대부분 도피성 이민이라는 데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막연한 사회불안 등을 이유로 부유층이 이중생활형 이민을 모색하는 현상은 자칫하면 '남미화(상류 계급의 집단 해외 도피)'로 이어질 우려도 있다. 도피용 이민은 계층간 불만이나 위화감을 줄 수도 있는 만큼 사회통합 차원에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 땅의 돈 있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이들이 돈을 싸들고 외국으로 떠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면 정책 결정자들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우리나라 20대 젊은이들의 60%가 "가능하면 이민을 가겠다"는 여론 조사 결과다. 나라의 장래를 짊어지고 갈 청년세대 10명 중 6명이 이민을 가겠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나라의 장래를 생각할 때 여간 걱정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대학을 졸업했으나 취업은 바늘구멍 경쟁이다. 20대 실업이 전체의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청년의 위기'다. '사오정(사십 오세 정년)' 세대를 목격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에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그들이다. 한국의 정치 사회 상황에 환멸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고 20대 대부분이 나라를 떠날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도피성 이민과 다를 바 없다. 이민을 꿈꾸기 전에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려는 부단한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젊은 세대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성숙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기성세대의 몫이다. 중산층들이 투자이민을 떠나고, 젊은이들이 고국을 등진다면 누가 이 나라를 지킬 것인가.

- <저널 뉴코리아 5월호> (2003.05)

이규섭

여행작가·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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