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5월 3일 No. 737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 딴 글 보기 | 구독신청/해지 | columnist.org |
■ 이규섭의 세상엿보기(7)
도덕 불감증

해도 너무했다. 세무서장 시절 관내 호텔에 부정하게 법인세를 돌려준 혐의로 구속된 국세청 과장의 가택수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100만원짜리 현금 봉투들과 수표, 상품권 등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방 한 켠은 로열 살루트와 발렌타인 등 고급양주 200여병이 가득 차 룸살롱을 뺨칠 정도였다니 분노가 치밀다 못해 허탈하다. 그는 수사관에게 "친척한테 명절 선물로 받았다" "관내 주류업자에게 받았으나 대가성은 없었다"고 둘러대기 바빴다니 가증스럽다. 이 한 건으로 모든 공무원을 싸잡아 매도할 수는 없지만 부패구조가 여전히 공무원사회에 만연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정부는 지난해 깨끗한 사회를 만드는 게 일류국가로의 도약과 국제경쟁력 강화에 절대적 조건이라며 부패방지위원회를 출범시켰으나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뇌물공화국'이란 오명은 좀체 씻기지 않고 있다. 공무원 윤리규정을 만들고 5만원 이상의 선물 수수를 금하고 있지만 윤리 규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공무원 비리가 잇따라 터져 나온다.

권력기관의 부패지수가 높다는 것은 지난 주 부패방지위원회가 공개한 71개 공공기관 청렴도 조사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검찰청·경찰청·국세청 등 소위 '빅 3'로 불리는 권력기관일수록 일반 국민이 느끼는 부패정도가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뿐 아니다. 사회지도층의 도덕 불감증은 새 정부 장·차관 등 고위공직자 인사검증과정에서도 드러났다.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은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와 경력, 평판을 가진 상류층 인사들이 병역기피·부동산 투기·이중국적·원정출산 의혹 등으로 '낙마'했다고 밝혔다. 지도층의 도덕적 해이와 극단적 이기주의 경향이 어느 수준인가를 가늠하게 한다. 사회지도층과 상류층의 도덕적 불감증은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어려운 서민들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을 넘어 분노와 자괴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불감증은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니다. 역대 대통령과 측근들이 저지른 탐욕과 부도덕한 모습들이 국민들에게 끼친 폐해는 크다. 최근엔 노무현 대통령의 최 측근 두 사람이 나라종금의 대주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땅의 부패와 비리는 정치사회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윗물이 썩었으니 아랫물이 맑을 턱이 없고 일반 국민들도 도덕성의 타락에 대해 무감각해졌다.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물신주의와 도덕적 타락상은 원칙과 정도(正道)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오히려 바보취급을 받을 정도로 우리사회는 일그러졌다. 구호와 제도만으로는 건강한 사회를 구현할 수 없다. 사회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도덕적 의무)가 선행돼야 원칙과 정도가 지켜진다. 물질적 힘 보다 정신적 가치가 우위에 놓일 때 도덕성은 회복될 수 있다.

- <담배인삼신문 4월18일자> (2003.04)

이규섭

여행작가·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http://columnist.org/kyoos
http://columnist.org
[칼럼니스트]를 이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