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5월 2일 No. 736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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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섭의 맞춤여행
전북 고창 '3색 여행' - 역사의 숨결에도 색깔이 다르네

여행의 느낌에도 색깔이 있다. 새싹이 돋아나는 나무를 보면 초록빛 희망이 움트고, 산사의 고즈넉한 풍경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하얗게 바래진다. 역사의 숨결이 묻어나는 문화유산을 만나면 조상들의 청자 빛 얼을 느낀다. 전북 고창은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는 고창읍성,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 유적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 유적지, 천년고찰의 선운사, 곰소만에서 구시포까지 이어지는 70리 해안선 등 볼거리가 푸짐하다.

무병장수 기원하는 답성놀이 풍습

#고창읍성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고창 나들목에서 빠져나와 만나는 3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고창읍이고, 읍내 끝머리 오른쪽에 고창읍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고창읍성은 성곽도 아름답지만 전국에서 유일하게 답성놀이 풍습이 이어지는 곳이다.

안내문에는 '한 바퀴를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를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를 돌면 극락승천 한다는 전설이 내려온다'고 쓰여 있다. 원래 답성놀이는 윤달에 하는 행사. 윤달에 저승 문이 열리기 때문에 가장 효험이 많다는 민간신앙에서 비롯됐다. 성을 돌 때는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세 바퀴 돌아 성 입구에 다시 돌을 쌓아 둔다. 성 둘레는 1,684m. 성곽을 한번 도는데 30분 정도 걸린다. 성곽을 돌다보면 읍성이 천연 요새임을 짐작할 수 있다. 동쪽을 제외하고는 거칠 것 없이 탁 트인 들판과 고창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창군에서는 음력 9월9일에 모양성제를 열고 답성놀이를 한다.

고창읍성은 모양성이라고도 불린다. 백제 때 모양부리현이라는 지명에서 유래된 것 같다. 고창읍성은 고려 말엽부터 법성포를 중심으로 왜구의 노략질과 침입이 잦아지자 호남내륙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차단하고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단종 원년(1453년)에 축조한 성이다.

성내에는 동헌·객사 등 22동의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 있었으나 전쟁으로 모두 불타 없어졌으나 1976년부터 복원을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성내에 있는 울창한 송림도 참 아름답다. 수령이 적게는 50년에서 많게는 수백년에 이르는 청솔과 1930년대 한 스님이 사찰을 세우고 조경을 위해 심었다는 맹종죽이 운치를 더해 준다. 동헌과 객사 등에는 센서를 달아놓아 관광객들이 앞에 서면 스피커를 통해 유래를 들려준다.

고창읍성 앞 광장에는 덩치 큰 판소리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박물관에는 판소리 사설집·임금의 교지 등 신재효의 유품은 물론 그동안 한국 판소리를 이끌어 온 명창들의 계보가 소개돼 있어 판소리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독공(獨功)체험장인 발림마당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테스트할 수도 있다.

그 옆으로 신재효 고택이 남아있다. 신재효는 조선 후기 판소리를 집대성한 인물. 중인 출신으로 아전을 지냈던 그는 춘향가·수궁가·적벽가·심청가·박타령·가루지기타령 등 판소리 6마당을 정리하고, 인물·사설·득음(得音)·너름새라는 4대 법례를 마련하기도 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선사박물관'

#고인돌 떼무덤 고창읍에서 북서쪽으로 약 9.5㎞ 남짓한 지점에 자리한 고창읍 죽림리와 아산면 상갑리 일대에는 '고인돌 떼 무덤'이 몰려 있다. 몇 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447기의 고인돌을 확인했으며, 고인돌마다 '2513'식으로 고유번호를 매겨 놓았다. 조사 이전의 파괴된 기수를 합하면 대략 1,000여기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사시대의 무덤인 고인돌은 인류가 만들어온 거석문화의 원조다.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부르는 고인돌은 '고임돌이 있는 무덤'의 의미가 담겨 있다.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영어권에서는 돌맨(Dolmen)이라 한다.

죽림리 매산마을 뒤쪽에는 화실봉(표고 400m)이 방풍구실을 해주고, 마을 앞으로는 주진강 상류인 고창천이 가로 흐르며 평야지대를 이룬다. 고인돌은 화실봉 산림지역과 평야지대 사이의 완만한 경사지역에 무리 지어 있다. 동서로는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약 1,764m 범위에 분포되어 있다. 매산마을 한가운데 밭 가장자리에는 남한 최대의 바둑판식 고인돌이 있다. 가로 6.5m, 세로 5.3m, 높이 약 2m되는 상자모양의 고인돌이다. 마을 동쪽 송림 언덕배기에 올라가면 멋쟁이 고인돌 몇 기가 긴 세월을 의연하게 버티고 있다.

매산마을 고인돌은 2,500년 전부터 약 500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했던 족장의 가족묘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교과서에서 청동기시대로 불리는 삼한(三韓)시대 진국(辰國)의 유물인 것이다. 청동기인은 농사를 기본으로 한 족장 내지 부족체제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 이전에 살았던 빗살무늬토기인들이 강가에서 생활했던 것과는 달리 비옥한 터전을 찾아 야산과 들판에 둥지를 틀었다.

형식 또한 다양하여 북방식이라 불리는 탁자식, 상석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지상석관식, 남방식인 바둑판식 등 고루 분포되어 동북아시아의 고인돌 변천사를 규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창 고인돌은 전남 화순, 인천 강화의 고인돌과 함께 2000년 12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선운사 춘백

# 선운사 춘백 '선운사 골째기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미당 서정주가 동백꽃을 보러 갔을 땐 '아직 일러 피지 않았다'고 했지만 4월의 선운사엔 동백꽃이 선홍빛 꽃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풍천장'으로 유명했던 선운사 들머리,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는 들리지 않고 풍천장어집 간판만이 어지럽게 걸려있다. 선운사 매표소 못 미쳐 길 오른편에 세워놓은 미당 시비(詩碑·1974년 건립)는 시인의 육필로 새겨져 있어 정겹다.

도립공원 매표소에서 선운사까지는 1㎞. 동백꽃이 필 무렵이면 벚꽃이 터널을 이루고 꽃길이 끝나면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단풍나무, 곧게 자란 편백나무 숲길이 도솔천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577년) 때 검단선사가 지었다. 성종 3년(1472) 쑥대밭이 된 폐사지에 행호선사가 다시 일으켜 세웠으나, 정유재란 때 또 부서졌고 광해군 5년(1613)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절 집 건물이 늘어나면서 고즈넉하던 옛 분위기는 줄었으나 대웅전 뒷산의 진초록 동백숲(천연기념물 제184호)만은 변함이 없다. 5,000여평에 3,000여 그루의 동백이 무리 지어 사계절 푸른빛을 띈다. 멀리서 보면 숲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윤기 도는 푸른 잎 사이로 탐스러운 동백꽃이 꽃 등처럼 걸려 있다.

선운사의 동백꽃은 꽃샘바람이 잦아진 4월에 절정을 이뤄 춘백(春柏)이라고 한다. 여수 오동도, 보길도와 강진 등 남해안의 동백은 보통 2월 초순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해 3월 말이면 다 질 정도로 일찍 피지만, 선운사 동백꽃은 동백나무 자생지의 북방한계선 상에 있기 때문에 4월이 돼야 붉은 얼굴을 드러낸다.

절 집의 특별 배려로 철망으로 보호받고 있는 동백 숲에 들어가 보았다. 잎에 가려 모습을 볼 수 없었던 500년 노목들의 기품은 장관이다. 숲 속에 떨어진 동백꽃송이는 처연한 아름다움이다. 꽃잎이 시든 뒤에 한 잎 두 잎 지는 꽃들의 생리와는 달리 동백꽃은 꽃술과 함께 '진홍색 피를 토하고 목이 부러지듯' 송두리째 뚝뚝 떨어진다. 송창식의 노랫말처럼 '눈물처럼 후두둑 진다'. 대웅전 옆 동백 숲 앞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노란 수선화와 촘촘하게 꽃무리를 이루고 있는 하얀 앵두꽃이 선홍빛 동백꽃과 어우러져 삼색 조화를 이룬다. 꽃들의 합창속에 봄, 여름이 지나면 도솔암 일대 계곡에는 상사화가 그리움을 토해 낸다.

선운산(335m)은 숲이 울창하고 기암괴석이 많아 '호남의 내금강'이라 일컬어질 만큼 풍광이 빼어나다. 낙조대에 오르면 칠산 앞바다와 줄포만이 아득하게 보이고 석양빛은 눈물겹도록 황홀하다. 해마다 4월이면 선운산 도립공원 광장에서는 쭈꾸미 등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수산물축제'와 '동백꽃 귀한 잔치(冬柏燕)'가 열린다.

풍천장어와 복분자술은 단짝

#먹거리 고창의 별미는 풍천장어와 복분자술. 바다와 민물이 합쳐지는 풍천 어귀에서 잡힌 장어를 내장과 뼈를 빼내고 양념을 한 뒤 숯불에 구워 내온다. 풍천장어는 힘이 좋고 싱싱하여 스테미너 음식으로 이름 높다. 최근에는 다 자란 양식장어를 개펄에서 다시 길러 육질 속에 남아있는 사료 성분을 제거한 개펄장어가 인기를 끌고 있다. 개펄장어는 600∼700g에 5만원을 호가할 정도지만 육질이 쫄깃쫄깃해 호평 받고 있다. 선운사 관광단지의 연기식당(063-562-1537), 용궁회관(063-562-6464), 신덕식당(063-562-1533) 등 풍천장어 식당들이 있다. 1인분에 1만4000원 정도. 선운사에서 미당 생가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질마재식당(063-561-0046)은 반찬으로 나오는 서너 종류의 젓갈과 맛깔스런 김치가 일품이다. 산딸기 열매로 만든 복북자(覆盆子)술은 기력 보강에 좋다고 한다. '복분자술을 마시고 오줌독에 오줌을 누면 오줌독(盆)이 뒤집어진다(覆)'고 할 정도다. 풍천장어와 복분자술은 그래서 단짝이다.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정읍IC에서 빠져나와 바로 U턴한다. 15분쯤 직진하면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가면 부안, 왼쪽으로 가면 고창이다. ▶또 다른 길은 새로 난 서해안고속도로 고창IC에서 빠져나와 만나는 3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고창읍이다. ▶고창읍내 끝머리 오른쪽에 고창읍성과 신재효 고택이 보인다. ▶고창읍내에서 북서쪽으로 약 9.5㎞가면 죽림리, 상갑리 고인돌 밀집지역이다.▶고인돌을 둘러본 뒤 상갑리에서 733번 지방도로를 이용하여 10.5㎞가면 선운산 도립공원이다. 안내판이 잘 돼있다.

- <월간 '광업진흥' 4월호> (2003.04)

이규섭

여행작가·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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