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4월 23일 No. 730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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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섭의 세상엿보기(6) /
'땡처리 시장'

경기침체 속에 물가마저 치솟아 서민들은 살기가 어려워졌다고 한숨이다. 먹고살기 힘들어서 저지르는 이른바 '생계형 범죄'가 늘고 있다. 최근 검거된 절도범들의 20∼30% 이상이 소액의 현금이나 생필품을 훔친 사람들로 대부분 초범이라니 안타깝다.

이에 반해 부유층들은 달러와 금 사재기에 혈안이다. 신분 노출을 꺼려 암달러상을 통해 달러를 모으거나, 한꺼번에 3억∼4억원어치 금괴를 구입해가는 통 큰 사람도 있다고 한다. 위기를 통해 한 탕을 노리거나, 여차하면 나만 잘살겠다는 이기적 배금주의가 팽배한 탓이다. 빈부의 격차를 반영하는 우리 사회의 엇갈린 명암이다.

요즘 한국경제는 온통 잿빛으로 변하고 있다. 미국-이라크전쟁과 북한 핵 문제, SK글로벌 사태 등의 여파로 실물경기가 침체의 터널 속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가고 물가와 경상수지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경제부총리의 표현처럼 "검은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는 형국"이 작금의 우리 경제 상황이다. 경제 5단체도 현 상황을 'IMF 외환위기에 버금가는 어려운 경기침체 국면'이라고 규정했을 정도로 온갖 악재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다.

물가가 뜀박질하는 것은 국제유가 급등 외에 농수산물 수급 불안과 등록금 등 서비스 요금 인상이 주도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물가가 오르면 그 여파는 봉급소득자나 저소득층에게 더 쏠리게 마련이고 빈부격차 해소도 빛 좋은 개살구가 되기 쉽다.

소비심리의 위축으로 가계의 돈 씀씀이가 눈에 띄게 줄었다. 대표적인 소비업종인 백화점과 자동차업계의 1분기 영업실적이 악화됐다는 발표가 잇따르고 있다. 서울시내 주요 백화점들은 올 들어 처음으로 정기 바겐세일을 시작했지만 매장이 썰렁하기는 마찬가지다. 예년 같으면 백화점 주변 교통까지 마비됐는데, 올해는 야속할 정도로 분위기가 차분하다는 것이다. 세일 때면 으레 볼 수 있던 백화점 앞의 긴 사은품 대기행렬도 자취를 감췄다. 사은품은 20만원 혹은 50만원 이상 구매고객에게만 주는 것으로 1인당 구매단가가 그만큼 낮아졌음을 의미한다.

기업들의 투자 마인드가 크게 위축된 가운데 제조업체마다 물건이 팔리지 않아 2월중 재고율은 14개월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재고가 쌓이면 생산을 줄여야하고 생산이 줄면 자연히 고용이 감소된다. 고용이 감소하면 노동자 소득이 줄어들어 소비가 위축되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제조업체들의 창고마다 재고품이 쌓이면서 일부 기업들은 긴축경영을 넘어 아예 사업을 접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에 따라 재고품 할인 판매나 파산기업 제품 정리를 중계하는 '땡처리 시장'이 IMF경제위기 때 못지 않게 성업중이다.

그러나 불황의 골이 워낙 깊어 땡처리 시장도 이전 같지 않다고 한다. 예전엔 할인행사를 열면 3∼4일 이상 손님들이 북새통을 이뤘지만, 요즘은 둘째 날만 되면 발길이 뚝 끊어진다는 것이다. 불황이 땡처리 시장을 만들었지만 땡처리 시장도 불황의 영향을 심하게 받고 있다는 증거다.

- <담배인삼신문 4월11일자> (2003.04)

이규섭

여행작가·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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