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4월 16일 No. 727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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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살만한 세상을

서울의 어느 주택가에서 개업하고 있는 한 의사는 토요일 오후 4시 이후면 부근에 홀로 사는 노인들을 찾아 나선다. 그들이 일주일 동안 어떻게 지냈는가를 살펴 보고 일상생활의 자잘한 문제를 처리해 주기 위해서다.

그 친구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창시절을 힘들게 보냈고 지금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물적, 정신적으로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을 돌아보니 그 동안 남을 위해 진심으로 뭔가를 해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면 자신은 남을 위해 한번도 뭔가 해보지 못하고 살다 갈 것인가. 내게는 그렇게도 변변한 것이 없는가. 몇 번의 자문 끝에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속속들이 뒤져 보면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찾은 것이 지금의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거기서 그때마다 자기도 몰랐던 자신을 발견해 가고 있다.

신문기자였던 한 친구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시스템 구축과 봉사활동 준비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현직시절 해외출장을 갔다가 사고를 당해 청각을 거의 다 잃었다. 퇴직 이후 사업을 하고 있으나 잘 풀리지 않고 장애 때문에 어려움이 가중하고 있다. 한 마디로 앞가림이 쉽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자신이 청각을 잃어 가면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 고충을 이해하게 되었다. 또 물질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힘이 되어 줄 뭔가 자기에게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퇴직 후에 본격적으로 이 일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그의 노력에 동감한 이비인후과 의사 여러 명도 발을 맞추고 있다.

50대 중반의 어느 주부도 자기는 봉사활동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왔는데 최근 자신의 능력을 점검해 보고 구청의 한문강사로 나섰다. 자신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해 왔던 한문실력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걸 알고 기꺼이 자원봉사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의 집안도 그리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니다. 가족 중에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도 있다. 자원봉사라면 종교인이나 내신점수를 따기 위해 학생들이 노인 또는 지체부자유자들의 목욕이나 해주는 걸로 알고 있던 생각도 자연히 달라졌다.

50대 후반의 어느 퇴직자가 아직도 자기는 할 일이 많고 능력도 있는데 회사와 사회가 자신을 버렸다고 날마다 울분에 차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다. 그 사람은 툭하면 사방에 대고 원망이고 비난이어서 하루도 편한 날이 없다. 누가 봐도 능력이 탁월한지라 그의 언행을 틀리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항시 불평불만이 가득한 그를 대면하는 것이 편치 않아 대부분 피하고 만다.

한번은 그에게 이런 이들을 예로 들며 자원봉사 얘기를 꺼냈다. 그러나 그는 불같이 화를 내며 자기는 아직 젊으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 그에게는 자원봉사란 퇴직한 늙은이들이나 하는 것으로 입력되어 있었다.

남을 돕는다 하면 대부분 금전적인 것을 떠올린다. 아니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육체적으로 돕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이처럼 그밖의 능력이 필요한 곳도 이 사회에는 많다. 아무리 가난해도 도둑맞을 것은 있다는 말처럼 누구든지 털어보면 남에게 도움이 되는 강점이 있다.

그것을 개인들끼리 맞추고 연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가 이를 시스템화해서 남고 모자라는 것을 서로 나누고 보충하게 하는 고리가 되어주면 좋을 것 같다. 그런 움직임이 날로 각박해지고 힘든 우리 사회의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 아울러 이 사회가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고 흐뭇하게 생각할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 '담배인삼신문' 4월11일 (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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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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