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4월 15일 No. 726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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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가 만난 영화제 사람들(2)>
로테르담 영화제 집행위원장 사이먼 필드

사이먼 필드를 처음 만난 건 1993년 겨울, 내가 문화부 차관을 그만두고 공연윤리 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당시 영국현대예술원의 영화책임자를 맡고 있던 그는 94년 한국영화주간 행사를 기획, 한국영화를 처음 본격적으로 영국에 알린 당사자다. 이 행사의 영화 선정을 위해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아시아 영화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평론가 토니 레인즈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다.

영화진흥공사에서 그들을 만나지 않겠느냐는 연락이 와서 플라자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같이 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활달하고 호감이 가는 성격이었다. 당시에는 간을 좀 쉬게 하는 뜻으로 술을 끊고 있었는데, 그 다음날 아침에 떠난다는 사이먼을 위해 저녁에 술자리를 마련했다. <모텔 선인장>으로 데뷔하고 그 뒤 <낙타들>을 만든 박기용 감독과 토니 레인즈, 사이먼 필드, 나 이렇게 넷이 순천향 병원 앞 문인들이 많이 찾는 카페 가을에서 밤 10시쯤에 만났다. 이때 알게 된 것이지만 사이먼은 엄청난 호주가였다. 절제하느라고 한 잔씩 받아마시다가 나는 새벽 1시쯤 자리를 떴지만, 진을 좋아하는 토니 레인즈는 큰 것 한 병을 혼자 다 마셨고, 사이먼 필드와 박기용 감독은 위스키 두병을 다 비운 다음 포장마차에 들러 한잔 더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사이먼은 다음해 ‘SEOUL Stirring’ 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영화주간을 마련, 박광수, 장선우의 작품을 포함한 한국영화 10여편을 초청했다. 개막작이었던 임권택의 <만다라>는 그와 내가 더 친해진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때 <만다라> 프린트 원본은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개막작으로 상영이 어려울 정도였다. 그것을 창고들을 뒤져 비교적 화질이 선명한 독일어판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전화가 오갔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와의 만남은 훗날 부산영화제의 성공과 한국영화의 세계시장 진출에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95년 초, 로카르노 영화제 집행 위원장으로 옮기게 된 마르코 밀러 집행위원장의 후임으로 사이먼이 로테르담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새로 맡게 된 것이다.

96년 첫 부산영화제를 하면서 그동안 해외에서 한국영화 프로모션을 위해 공헌한 사람들에게 코리안 어워즈를 시상했는데, 당시 사이먼 필드도 한국영화주간 행사의 공로를 인정 받아 이 상을 수상했다. 그런 인연으로 97년 로테르담 영화제에 그가 나를 심사위원장으로 초대했다.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은 커녕 국내 영화제 심사위원도 한 일이 없는데 그것도 심사위원장직을 맡겨서 굉장히 당황했다. 심지어 교보문고에 가서 영어로 된 국제회의에 관한 책을 모두 산 다음, 의회에서 회의하는 절차를 영어로 공부하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전혀 도움이 안됐지만 어쨌든 지금도 웃음이 나는 경험이다.

당시 심사위원 중엔 샹딸 액커만 같은 성격 까다로운 프랑스 유명감독도 있었고, 미국 영화 평론가, 튀지니 여감독, 네덜란드 여배우 등이 있었다. 다행히 그 때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경쟁 부문에 올라와 만장일치로 본상이 타이거 어워즈를 수상하게 됐다. 이래저래 그 해의 로테르담은 내게 굉장히 재미있고 유익한 경험이었다.

그때 가서 보니까 로테르담은 사이먼 필드가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굉장히 의욕적으로 키우고 있는, 도약하는 영화제였다. 95년 창설된 타이거 어워즈도 세계 영화감독들 중에서 가장 촉망받는 신인 감독 세명을 선정, 1만 유로씩 시상하는 신인발굴 등용문으로 컨셉트를 확정하는가 하면, 초청영화 편수와 게스트를 대폭 늘리는 등 영화제 규모를 과거보다 훨씬 확대했다.

그러한 추세는 그가 맡았던 지난 8년 동안 계속되어왔다. 시와 중앙정부 당국과 끊임없이 협상을 벌여, 애초 2백만 달러 정도였던 영화제 예산을 5백만 달러 규모로 키웠다. 덕분에 95년 2백편 정도였던 상영작이 올해의 경우, 거의 7백편에 달했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관객 연인원도 15만-16만 수준에서 30만명이 넘는 규모로 성장했고 98년에는 영화제 전용관인 7개관 2천 1백석 규모의 멀티플렉스 빠데 극장을 시내 한복판에 건립토록 유치했다. 게다가 2001년에는 30회 기념으로빠테 극장 바로 옆 건물을 컨벤션 홀로 새로 개조, 710석 짜리 전용극장과 4개층의 넓은 공간을 영화제 기간동안 영화제 전용 공간으로 쓸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 결과 그가 맡기 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영화제였던 로테르담은 비록 비경쟁여화제이긴 하지만, 이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상영할 뿐 아니라, 칸이나 베를린에 이어 가장 많은 영화인을 만날 수 있는, 세계 10위권 이내에 들어가는 영화제로 발돋움했다. 이는 전적으로 사이먼 필드의 공적으로서, 한사람의 역량이 한 영화제를 그만큼 키울 수 있다는 산 증거다.

97년에 처음 로테르담 영화제에 참가하면서 굉장히 부러웠던 건 프로젝트 마켓이라고 할 수 있는 시네마트였다. 세계의 유망한 감독들이 차기 제작 기획을 들고 와서 세계 유수의 배급업자, 제작자, 재정지원자들과 만나서 작품에 재정지원을 받거나 합작선을 구하거나 하는 마켓이 시네마트다. 그것을 모델 삼아서 97년 가능 부산 프로모션 플랜 (PPP)을 위한 예비 국제회의를 개최했던 것이다. 당시 로테르담 책임자였던 바우터 바렌드레히트와 미국의 유사한 책임자들 초청, 준비 세미나를 가진 뒤 99년 3회 영화제 때부터 제 1회 PPP를 창설했다. 그리고 로테르담 시네마트와 부산 PPP간에 시네마트에서 소개됐던 아시아 영화감독 프로젝트 2편을 PPP에 가져오게 하고 부산에서 소개됐던 아시아 작품 두편을 시네마트에 갖고 가게 하는 자매결연 관계를 맺어, 두 영화제 간에 지금까지 긴밀한 협력관계 유지해오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나하고 사이먼의 관계는 전 세계 영화제에서 알아주는 주당커플이 되었다. 사이먼 필드가 나보고 serious drinker 라고 하면 나는 당신이 더 serious 하다면서도 둘이 만나면 거의 밤 새우다시피 술을 마신다. 지난해에는 시애틀 영화제에서 각각 다른 부문 심사위원을 맡아 같이 심사하면서 더 친해졌다. 오히려 로테르담이나 부산에서는 서로가 영화제 운영 때문에 바빠서 한 두번 밖에는 술자리를 갖지 못하지만, 다른 영화제에서 만났을 때는 자주 같이 술자리를 하다보니까 굉장히 가까운 친구가 된 것이다. 나는 해외 영화제에 나가면 룸파티를 많이 하는 편인데, 사이먼은 밤늦게 지나가다가 우리 방에 붙잡히면 새벽까지 함께 있어야 하니까 층을 달리해서 자기는 항상 우리방을 피해 다닌다고 농담할 정도이다.

타이거 클럽의 맹호들

이쯤해서 타이거 클럽을 소개해도 괜찮을 것 같다. 타이거 클럽의 멤버는 사이먼과 나, 대만 감독 허우샤우시엔, 네덜란드의 원로 저널리스트 피터 반 뷰렌이다. 2000년 허우 감독이 <밀레니엄 맘보>를 갖고 부산을 찾으면서 심사위원까지 겸했고, 끝나고 귀국하기 전에 송별회를 하면서 격의 없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런데 이듬해인 2001년 로테르담에 갔을 때 허우샤우시엔이 또 심사위원으로 와 있었던 것이다. 로테르담의 본상이 타이거 어워즈 이고 피터가 네덜란드인인데다, 내 이름에 호랑이 호자가 있는가하면, 모인 말이 마침 호랑이해의 음력 설날이어서 모임 이름이 자연스럽게 타이거 클럽이 됐다. 이제 타이거클럽은 세계 영화제 관계자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조직이 됐다.

사이먼이 로테르담을 떠나게 됐다는 소식은, 그래서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올해 32회 로테르담 영화제의 시상식 전날, <질투는 나의 힘>이 경쟁부문에 오른 것을 축하하며 피터 반 뷰렌이 자기가 갖고 있던 안동소주를 내놓아서, 사이먼하고 같이 있던 한국대표들하고 한 병 마셨다. 그 이후 호주팀들하고도 한잔 나누고 하는 사이에 사이먼 필드가 전례없이 많이 취했다. 그렇게 취한 모습은 처음 볼 정도였다. 호텔에 데려다주는 동안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질투는 나의 힘>이 타이거 어워즈를 받게 된다는 암시를 주었지만, 조금 이상하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직전 피터 반 뷰렌하고 사이먼의 임기가 2년정도 더 남았다는 애기를 했다. 하지만 중앙정부에서 예산 10%를 삭감하고 시 정부에서도 예산을 삭감했으며 스폰서 구하기도 어려워졌다는 애기도 들었다.

그러나 그가 사임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로테르담 영화제가 끝난 뒤베를린에 갔을 때였다. 그가 다음 영화제까지만 하고 그만 두기로 했다는 소식은 그 곳 영화계 인사들 사이에서 톱 뉴스로 회자되고 있었다. 이유는 소위 영화제 이사회 쪽과의 갈등이었다. 언론에 보도된 공식적인 퇴임 이유에 따르면, 사이먼이 95년부터 9년동안 영화제를 맡아오면서 네덜란드 말을 배울 생각을 안하고, 집을 영국에서 로테르담으로 옮길 생각을 안하고 있다는 비난이 이사회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전임자인 이탈리아인 마르코 밀러도 네덜란드어를 한 일이 없는 만큼 하필 사이먼만이 문제가 될 건 아니었는데 사임 이유가 아리송했다. 영화계 인사들에 따르면 영화제 운영권을 네덜란드 사람에게 넘기기 위한 수순이라는 분석이 유력했다.

20년동안 로테르담의 프로그래머로 근무해왔고, 오랫동안 부집행위원장으로 근무해오면서 시네마트 책임을 맡았던 산드라 댄 하머가 30회 되던 2001년부터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아왔다. 사이먼 필드의 경우는 주로 해외 중요 영화제를 순례하면서 직접 프로그래머 역할을 겸했고, 산드라 댄 하머는 주로 영화제 운영을 전담해왔는데 하머는 네덜란드 사람이다. 내년 이후 집행위원장을 산드라 댄 하머가 맡을지, 아니면 지금 시네마트를책임지고 있는 이도라는 또 다른 네덜란드 사람이 맡게 될지 두고봐야 될 일이지만, 누가 맡더라도 2005년 이후 로테르담 영화제가 현재보다 더 발전하기를 기대하기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 하는 전망을 갖게 된다.

- ‘프리미어’ 4월호(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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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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