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맞춤여행/구례-광양-하동
섬진강 줄기 따라 꽃구경 가세
남도에 꽃바람이 불고 있다. 꽃바람 타고 꽃구름이 핀다. 전북 진안에서 발원하여 3개 도와 12개 군을 넘나들며 남도 5백리 길을 휘감아 흐르는 섬진강 기슭은 울긋불긋 꽃 대궐이다. 잎 보다 먼저 꽃이 피는 구례군 상동마을의 샛노란 산수유 꽃, 희디흰 속살을 드러내는 광양 다압면 섬진마을의 매화, 강 건너 하동 화갯골의 벚꽃과 차시배지를 둘러보는 것이 '봄철 꽃 관광유닛의 대표적 코스다.
노란 꽃구름에 샛노란 그리움
#구례 산수유 마을 봄의 전령 산수유는 잔설이 채 녹기도 전인 2월 중순경 꽃이 피기 시작해 4월초까지 노란 꽃을 피운다. 지리산 기슭 전남 구례군 산동면은 국내 최대의 산수유단지다. 48개 산간마을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산동면 일대는 봄이면 노란 물감을 뿌려놓은 듯하다. 서울에서는 중부고속도로를 거쳐 호남고속도로 전주IC에서 17번 국도를 타고 남원을 경유, 남원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밤재 터널을 빠져나오면 산동면이다.
이 일대 산수유나무는 2만8000여그루로 한 해 전국 생산량의 절반이 넘는 산수유를 생산해낸다. 연간 24t의 산수유를 수확하여 37억원의 농가수익을 올려 척박한 땅에 열리는 '돈 꽃'이라 불린다. 산동면 가운데서도 지리산 만복대(1433m) 아래에 위치한 상위마을은 산과 들, 돌담길과 계곡 등에 온통 산수유나무가 들어서 있는 산수유마을이다. 마을 들머리의 다리를 건너면 만복대쪽에서 흘러 내려온 묘봉골 개울을 덮고있는 산수유가 노랑 꽃구름처럼 피어난다.
중국 '산둥(山東)'의 처녀가 지리산으로 시집을 올 때 산수유나무를 가져다 심었다고 해서 마을이름이 '산동(山洞)'이 됐다. 상위마을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모여들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한 때 80여 가구가 둥지를 틀었던 큰 마을이었으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뿔뿔이 흩어지고 지금은 21가구만 남았다.
매화꽃향기는 강물 따라 흐르고
#광양 매화마을 샛노란 산수유꽃 감상을 끝내고 매화꽃 별천지로 향한다. 광양 매화마을은 산동에서 나와 구례∼하동 19번 국도를 이용한다. 토지면소재지를 지나 간전교를 건너면 섬진강 줄기를 따라 861번 지방도로가 이어진다. 20여㎞ 섬진강 줄기를 끼고 달리면 섬진매화마을 간판이 나온다. 광양시 다압면 일대는 한국 최대의 매실산지로 섬진마을을 비롯, 다사마을, 서동마을, 동동마을 등 마을마다 매화꽃이 화사한 꽃 자수를 놓는다.
백운산 삼박재 기슭의 섬진마을 청매실농원은 매화꽃으로 뒤덮여 눈이 부신다. 일찍 피어나는 올매화, 늦게 피는 넘매화, 60년 노목도 뒤질세라 솜사탕만한 꽃송이를 뿜어낸다. 밭과 밭 사이에 매화가 터널을 이루고 파랗게 자란 보리가 어우러져 봄의 제전을 펼친다. 마당에 놓인 2,000개가 넘는 장독대에서는 매실된장이 익어가고 있다. 눈을 들어 강 쪽을 바라보면 섬진강 푸른 물과 하얀 모래사장, 녹색의 대나무 숲이 삼색 조화를 이룬다.
청매실농원을 일군 홍쌍리(60)씨는 매실제품 개발로 전통식품 명인 1호다. 매실농축액, 매실장아찌, 매실 장류, 매실초콜릿 등을 개발했다. 다압면 사람들은 평지가 없는 불리한 조건을 이겨내기 위해 150여년 전부터 밤나무와 매화나무를 심었다. 광양이 매실산지의 천혜적 적지인 것은 남해로부터 30km 떨어져 있어서 아침엔 적당히 걸러진 해풍이 밀려와 섬진강의 습기에 섞이고, 낮엔 백운산 산등성이가 내려주는 육지기운이 와 닿는 등 매화가 성장하기에 좋은 기후조건에 배수가 잘 되는 자갈토질을 갖췄기 때문이다.
광양 매실은 10여년 전부터 '건강보조식품'으로 인기를 끌면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이곳서 생산된 매실은 알이 굵고 품질이 뛰어나다. 매실의 신맛에는 몸의 노폐물을 말끔히 씻어주는 구연산 등 몸에 좋은 유기산이 풍부해 체질개선에 도움이 된다.
작설차의 그윽한 다향 자욱
#화곗골 차(茶)시배지 광양 다압면에서 바라다 보이는 섬진강 건너편이 화개장터가 있는 화갯골. 섬진마을에서 나와 861번 지방도로를 타고 광양 방면으로 5분 거리에 섬진대교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면 하동이다. 다시 19번 도로를 이용해 구례쪽으로 간다. 쌍계사 방면이다. 오른쪽으론 박경리의 '토지'에 등장하는 평사리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조금 더 가면 영·호남이 어우러진 '화개장터'다. 4월초순이면 난장(亂場)에서 쌍계사로 가는 10리길에 벚꽃이 터널을 이룬다. 춘란이 뿜어내는 난 향기와 작설차의 그윽한 다향이 자욱히 퍼지는 때도 이 무렵이다.
쌍계사에서 10㎞ 더 올라가면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훨씬 앞선 가락국 시대에 불교가 처음 들어왔다는 칠불사 터가 있다. 1주일간 불을 지피면 겨우내 화기가 남았다는 온돌 아자방(亞字房)을 1978년에 복원해 놓았다. 벚꽃터널 맞은 쪽 화개면 운수리 석문마을은 이 땅에 차(茶)가 처음 도입된 시배지다.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에서 차나무를 들여와 지리산 기슭에 심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와 있다. 조선시대 때 실학자 정약용은 그 때 차 씨앗을 심은 곳이 화개동 언저리라고 적었다. 산비탈에는 차밭이 즐비하고 '차시배지'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화갯골 녹차는 일제시대의 남벌, 한국전쟁이 상흔, 1960년대 유실수 정책을 내 세운 개간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야생은 점차 사라지고 재배녹차가 늘고 있는 추세다. 차를 따는 시기는 대체로 곡우가 낀 양력 4월20일 전후. 그 때 딴 차를 '우전차'라 하여 최상품으로 친다. 겨울을 난 새순은 참새의 혀를 닮아 '작설차'라 부른다. 4월말까지 딴 것을 '세작'이라 하고 5월 중순께 딴 차를 '중작'이라 한다. 차를 은근하게 우려 내 정담을 나누면 다도(茶道)의 품격도 함께 우러난다. 찻집 관향다원(觀香茶苑)에 들러 맑은 녹차 한 잔 마시면 꽃구경으로 어지러웠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 <월간 '광업진흥' 3월호> (2003.03)
이규섭
여행작가·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http://columnist.org/kyoo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