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을 꿈꾸는 사람들
내가 만약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된다면 산 좋고 물 맑은 배산임수(背山臨水) 터에 아담한 별장을 짓겠다. 아침에 일어나 흐르는 물에 세수를 하고, 계곡을 따라 산책을 한다. 낮에는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지루하면 텃밭에 나가 구슬땀을 흘리며 풀을 뽑는다. 밤이면 달과 별, 바람소리 벗삼아 명상에 잠겨보기도 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할 수도 있다. 별장 옆에 통나무집이나 황토방 몇 채를 지어 여행자들의 숙소로 제공한다. 텃밭의 푸성귀는 먹을 만큼 나눠준다. 그 곳을 찾아오는 나그네를 통해 세상사는 이야기도 듣는다. 가끔 친구들을 초대하여 술도 마시고 고스톱을 치면서 돈을 잃어주는 것도 그냥 여비를 건네주는 것보다 덜 미안해할 것이다.
이 나이에 제아무리 유유자적해본들 그 많은 돈을 언제 다 쓰겠는가. 복권발행 취지에 걸맞게 노인복지시설에 기부도 한다. 생활의 여유가 없는 친인척의 순위를 매겨 생활비 한 뭉치씩 지원해준다. 가끔 해외여행을 통해 문화적 견문도 넓힌다. 생각만으로도 흐뭇하고 즐겁다.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되면 내 집 마련부터 하겠다". 한 결혼정보회사가 직장인들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의 최우선 순위다. 세계여행을 하고, 불우이웃을 돕고, 사업이나 창업을 하겠다는 순으로 희망사항이 이어진다.
로또(Lotto·행운)복권은 당첨금이 많으니 대박을 꿈꾸기엔 그만이다. 복권을 사서 당첨을 기다리는 동안 자신에게 걸 맞는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으니 나쁠 거야 없다. 다른 복권과 달리 번호를 스스로 선택하는 묘미도 있다. 푼돈으로 즐거움을 맛보고 스트레스를 푸는 오락성의 매력도 있다. 비록 인생역전을 꿈꾸다가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끝난다해도 풍선처럼 부푸는 꿈과 기대로 1주일을 보내니 따분한 일상의 자극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만약 로또복권 1등에 당첨돼 돈벼락을 맞으면 정신적 공황(恐慌)에 빠져 삶의 질서가 헝클어 질 것 같다.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별장을 짓기는커녕 돈 관리를 제대로 못한 채 공포(恐怖)에 떨 것이고, 대인기피증에 시달릴 것이다. 인생역전을 꿈꾸다가 인생타락이 두려워 아직까지 로또복권 구매대열에 끼지 못했다.
자신의 삶에 녹아들지 않은 돈벼락은 자칫 불행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미국의 한 자동차 수리공은 당첨금 2071만달러(약250억원) 복권에 당첨된지 11년만인 지난 2000년, 500만달러의 빚까지 진 채 파산했다. 무모하게 회사를 인수했다가 경영미숙으로 문을 닫았고, 흥청망청 돈을 쓰다가 이혼까지 했다. 65억원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된 주인공도 대인기피증에 심한 스트레스로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당첨되더라도 신원이 노출되면 주변사람들에게 시달려 '행복 끝 불행 시작'이라는 데 초점을 맞춘 '로또 당첨시 행동지침 10계명'이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퍼지고 있다. 당첨사실을 확인하면 변호사를 고용해 신원을 밝히지 않고 당첨금을 수령할 방법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당첨 후 3개월 이내에 수령하면 되므로 서두르지 말고 주변을 정리한 뒤 당첨금을 찾으라는 권고도 있다. 신원 노출을 방지할 수 있도록 절대 기자회견을 하지 말라, 즉시 이사가라, 표정관리를 잘 하라는 등 당첨자 수칙도 올라 있다.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손해볼 건 없으니 알아두는 것도 좋다.
복권은 공적기금을 조성하고 구매자들에게 기회와 희망을 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문제는 거액의 당첨금을 미끼로 '인생역전'을 부추겨 온 국민을 한탕주의로 몰아넣는 역기능이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당첨의 환상'에 빠져 가계를 터는 것도 모자라 빚을 내 복권을 구입해 '대박'을 노리다가 '쪽박'을 찬 시민도 많다. 인생을 역전하려고 전력투구한 사람일수록 후유증은 심하다. 130만원 월급쟁이가 카드 빚 등을 내어 3,000만원어치를 구입하여 250만원을 건진 경우는 과욕이 빚은 비극이다.
버튼을 누르면 먹을 것이 쏟아져 나오는 자동 배식기 앞에서 쥐는 다른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버튼을 힘겹게 눌러야 음식이 나오면 쥐는 배식기에 관심이 멀어지면서 먹이를 구하기 시작한다. 쥐를 대상으로 한 '노력과 보상'에 대한 실험 결과다. 노력과 보상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는 것이 이상적인 사회다. 자동 배식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복권을 구입했다가 휴지로 변하면 실망과 좌절감으로 인해 근로의욕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성실하게 노력하여 사는 것 보다 단 '한방'에 끝낸다는 가치관의 전도 현상도 문제다.
무엇이든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소박한 마음으로 복권을 구입하여 달콤한 꿈에 젖는다면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다. 가볍게 즐기는 오락 정도로 참여하는 게 정신건강에도 좋다.
- <플래티늄 라이프 3월호>
(2003.03)
이규섭
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http://columnist.org/ky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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