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3월 15일 No. 711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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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의 세상 엿보기(2) 구멍가게

구멍가게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구멍가게 주인들도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지 않는다. 집 근처 초등학교 후문 귀퉁이에 위치한 세 평 남짓한 구멍가게는 근린공원을 산책하려 가는 길에 담배를 사러 가끔 들린다. 구멍가게 주인은 작달만한 키에 허리가 굽은 칠순의 할머니다. 가게 앞 공터에 빈 병이나 신문지 등 폐품을 모아서 팔 정도로 부지런하다. 얼마 전 담배를 사려고 그 가게에 가니 함석 문이 굳게 닫혀 있고, 회색 함석에는 '임대' 쪽지가 붙어 있다. 할머니가 구멍가게를 '저승'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지난 여름에는 초등학교 정문 부근에 있는 구멍가게 할머니가 갑자기 보이지 않아 할아버지에게 할머니의 안부를 물었더니 "먼저 보냈어"라며 담담하게 말한다. 노인들이 소일 삼아 운영하는 구멍가게 주인들도 사라져 가는 가게와 운명을 함께 하는 것 같아 서글프다. 코묻은 돈으로 눈깔사탕이나 쫀디기 과자를 사먹었던 어린 시절, 캐러멜을 훔치던 아이들을 붙잡아선 '먹고싶어도 참을 줄 알아야 한다'고 당부하며 캐러멜을 나눠주던 구멍가게 아저씨의 후덕한 인심도 추억의 편린이 되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요즘은 상인을 만나지 않고 흥정이랄 것도 없이 컴퓨터 앞에서 마우스를 클릭하면 물건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디지털 시대다. 전자상거래가 아니더라도 대형 할인판매점이나 슈퍼마켓, 백화점에 들러 싸고 편하게 물건을 구입하는 문명의 혜택에 익숙해진 게 우리들이다. 동네 주민을 상대로 담배나 식품, 생필품 등을 팔던 '서민의 벗' 구멍가게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구멍가게식 운영'이니 '구멍가게만도 못한 경영'이니 하는 비유의 대상이 될 정도로 홀대를 받아왔다.

흔히 구멍가게로 불리는 서울의 '기타 음·식료품 위주 종합 소매업체'는 1999년 말 2만539곳이던 것이 2001년 말 1만8395곳으로 10% 감소했다. 전국적으로는 1997년 말 14만2935개이던 것이 2001년 말 11만1888개로 20% 이상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상대적으로 할인마트나 슈퍼마켓은 늘어나면서 덩치가 커지고 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덩치가 커야 사람을 끌어들인다. 대형 사우나와 찜질방이 늘어나면서 동네 목욕탕 역시 천덕꾸러기다. 각종 휴게시설이 구비된 찜질방엔 젊은이들이 큰 대자로 누워 어른들은 안중에도 없다. 어른들의 등을 밀어주던 동네 목욕탕 풍경도 사라진지 오래다. 교회도 갈수록 덩치가 커진다. 덩치 큰 교회에 나간다고 하나님이 더 넓은 가슴으로 받아드리지는 않을 터인 데, 신도들은 동네 작은 교회 앞을 지나 덩치 큰 교회로 발길을 돌린다. 거대한 공룡들이 불가사리처럼 작은 것들을 집어삼키는 약육강식의 법칙 앞에 작은 것이 아름답고 소중했던 삶의 가치도 구멍가게처럼 위기를 맞고 있다.

- <담배인삼신문 3월14일자> (2003.03)

이규섭

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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