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가 만난 영화제 사람들(1)> 도빌에 알랭 파텔은 없다
지난해 열일곱번이나 해외여행을 했는데, 그중 열다섯번은 국제영화제에 참가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스위스의 로카르노 영화제, 미국의 시애틀 영화제, 인도영화제와 싱가포르 영화제는 심사위원 자격으로,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칸, 베를린, 베니스 영화제는 각국 영화인들과의 미팅을 위해 참가했으며 지난해 50주년을 맞았던 스페인의 산 세바스찬 영화제는 그 기념 행사를 보기 위해 자비로 갔다 왔다. 이 글도 작년 베니스에서 <오아시스>팀과 함께 만난 최보은 편집장의 권유로 쓰게 된 것이다.
사실 부산국제영화제를 맡기 전까지 해외 영화제에 가본 일은 캐나다의 몬트리올 영화제 두 번, 그리고 모스크바 영화제가 전부였다.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맡고 있던 88년,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백치 아다다>가 경쟁부문에 선정되었다. 세르주 로직 집행위원장이 영화진흥공사 시사실에서 보고 초청한 영화인데도, 제작사의 박종찬 사장도 임권택 감독도 관심이 없는 것이었다. 현지에 대표단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당시 잘 모르고 지내던 임권택 감독과 지방에서 드라마 촬영 중이던 신혜수를 설득해서 함께 몬트리올 영화제에 참가했다. <백치 아다다>는 현지 언론과 관객의 좋은 평가를 받았고 신혜수는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990년에는 신승수 감독의 <수탉>이 경쟁무분에 올라 두 번째로 몬트리올을 방문한 바 있다. 세르주 로직 집행위원장은 아직도 건재하다.
두 번째로 참가한 영화제는 모스크바 영화제다.
영화진흥공사에 부임하면서 우선 시작한 일이 서울 올림픽 기념사업의 하나인 '우수 해외 영화 초청' 사업이었다.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한 30여편의 영화들을 초청해서 세종문화회관과 삼성동 현대백화점내의 소극장에서 시사회를 갖는, 이를테면 소규모의 영화제였는데 당시 구소련, 동독,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들 공산권 국가에서 제작한 영화 <차이코프스키>의 필름 상태가 좋지 않아 미얀마 양곤에 있던 소련영화수출입공사와 동남아 지사장 차라드라스키로 하여금 새 프린트를 들고 서울에 오도록 특별 초청했고, 서울에 온 차라드라스키와 협의하여 한국 영화가 처음으로 모스크바 영화제에 초청받을 수 있도록 요청하게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공산권 국가에서 개최되는 모스크바 영화제에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바라아제>가 공식초청되고, 이 영화제에서 강수연은 여우주연상을 수상, 이른바 월드 스타로 각광받게 되었다.
몬트리올과 모스크바 영화제에 대한 조금은 환상적이고 매우 외양적인 인상을 갖고 있던 중 1995년 8월 18일 중앙대학교 이용관 교수, 부산예술대학 김지석교수, 전양중씨 그리고 공연기획사의 김유경대표로부터 함께 부산에서 국제영화제를 창설하자는 제의를 받고 즉석에서 수락했다. 영화제 운영에 대해서는 아무런 노하우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흔쾌히 수락한 것은, 영화진흥공사 재직 4년 동안 이룩해 놓은 국내외 영화인들과의 인맥을 믿는 마음에서였다. 우리나라 영화인들과는 제도권이든 재야인사든 가리지 않고, 노년층이거나 젊은 층이거나 상관없이 폭넓게 만났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의 영화인들도 거의 빼놓지 않고 만나서 점심이나 저녁을 샀고 또 술자리를 통해 친교를 다져왔다.
이런 인맥이 부산국제영화제를 첫 회에 성공시킨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96년 2월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를 출범시킨 후 3월에 개최된 홍콩영화제와 5월에 열린 칸 영화제에 참가, 중요한 외국 영화인들을 초청했다. 특히 칸에서 주선한 오찬에는 칸의 피에르 리시엥과 막스 테시에, 알랭 잘라도 낭트영화제 집행위워장, 세르주 로직 몬트리올영화제 집행위원장, 사이먼 필드 로테르담영화제 집행위원장, 울리히 그레고르 베를린영화제 영 포럼 집행위원장, 클라우스 에더 뮌헨영화제 집행위원장 겸 세계비평가연맹 사무총장 등 15명의 영화제 책임자와 기자들이 참석해서 성원을 다짐했다. 그러나 가장 큰 어려움은 결과적으로 22억원이 소요된 예산을 조달하는 일이었다. 부산시에서는 3억원 밖에 지원받지 못한 채, 입장료 수입 4억원을 제외한 15억원의 기업 협찬을 받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부산과 서울에서 모금 행사를 통해 지원을 받았으며 정희자 힐튼호텔 전회장으로부터 3억원을 협찬받았다. 배우 정윤희씨와 당시 프리미어 사주이던 고은아씨의 협찬을 받는 등 동분서주하면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부산국제영화제는 1996년 9월 13일 막을 올리게 된 것이다.
영화 전문지 <무빙 픽쳐스 Moving Pictures> 와 <스크린 인터내셔널 Screen International > 에 매년 소개되는 국제영화제는 400에서 500에 달한다. 베니스, 칸, 베를린, 로카르노 영화제처럼 5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지닌 영화제가 있는가 하면 부산국제영화제처럼 짧은 역사를 지닌 영화제도 있다. 이 많은 영화제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어떤 특징이 있어야 한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세계 모든 나라의 다양한 영화를 초청해 선보이지만 특히 아시아의 새로운 영화와 감독을 발굴하여 세계에 소개하는 데에 역점을 두고, 아시아 영화감독들의 영화 제작을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일들을 수행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영화를 선정하고 프로젝트를 마련하는 프로그래머들이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또한 세계 영화제를 움직이는 인맥이다. 내가 부산영화제 집행위워장으로서 맺은 이런 영화계 인맥들과의 교우가 앞으로 한국영화의 해외 도약에 작은 거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짧은 글재주나마 이들에 대한 소개를 시작해볼까 한다.
지난 1월 16일 방콕국제영화제 개막식장에서 프랑스 도빌아시아영화제의 알랭 파텔 집행위워장을 만났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영화제 준비가 잘되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뜻밖의 답변을 했다. "영화제가 커지면서 내가 감당할 수 없게 됐다. 스폰서도 구하기 어렵고... 그래서 영화제를 내놓았다. 영화제의 브랜드를 팔려고 한다. 구매자를 물색중이다."
네델란드의 로테르담영화제 폐막후 프랑스 파리에 와서 2월 3일 오전 11시 새로 이사한 칸영화제 사무실을 방문했다. 로테르담영화제는 매년 2월 2일 전후에서 폐막되고 베를린영화제는 2월 5일 전후에 열린다. 그래서 로테르담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도중 칸영화제 사무실에 들려 한국영화계의 소식, 특히 칸에서 관심을 갖고 있는 우리 감독들의 영화제작상황을 전하는 것이 연례행사로 되어 있다. 출타중인 질 자콥 회장을 제외한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 크리스천 존 수석프로그래머, 그리고 한국영화의 선정에 직간접으로 간여하고 있는 피에르 리시앙과 전양준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가 자리를 함께 했다. 금년에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칸의 마감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고 이 영화가 아마도 그의 전작들에 비해 가장 좋을 것이라는 전망과 더불어 전수일(<파괴>), 이윤택(<오구>), 홍기선(<선택>), 박경희(<미소>)의 새 영화들도 관심을 기울일 만 하다는 이야기도 했다.
이야기 끝에 도빌영화제가 화두에 올랐다. 크리스천 존에 의하면 도빌아시아영화제는 매년 9월에 열리는 도빌미국영화제에 이미 넘어 갔으며 도빌영화제의 프로그래머인 제레미는 영화제가 끝난 후 칸영화제의 감독주간(directors' fortnight) 프로그래머로 일하게 됐다고 한다.
도빌아시아영화제를 창설한 알랭 파텔은 외과의사다.
독신인 그는 오래 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근무한일도 있고 부산에서도 봉직했던 지한(知韓)인사다. 처음부터 그와 함께 프로그래머로 뛰고있는 제레미의 부인, 이은선씨는 한국인이다.
1999년 3월 사재를 털어 영화제를 창설한 그는 제 1회 영화제 때 <지옥화> 등 네편의 신상옥 감독영화를 상영했다. 작년까지 도빌영화제는 한국 영화를 위해 태어난 듯했다. 제2회 때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3회 때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가, 그리고 제4회 영화제에서는 송해성 감독의 <파이란>이 각각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주요상을 3년 연달아 휩쓸었다.
작년에도 알랭 파텔은 재정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영화제의 전체 규모를 20% 정도 축소한 바 있다. 파리에서 서북방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위치한 조용한 작은 마을 도빌,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그리고 명마(名馬)와 명주(名酒) 칼바도스의 산지로 이름높은 도빌, 봄에는 아시아에서 온 미지의 영화들로, 그리고 가을에는 좁은 거리 곳곳에서 마주치는 할리우드 스타와 낯익은 감독들로 영화팬과 관광객들을 들뜨게 하는 도빌의 봄이 내년부터 또 어떤 모습으로 바뀌게 될지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 프리미어 3월호 (2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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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http://columnist.org/geti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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