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3월 3일 No. 702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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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씨앗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거세던 IMF 시절, 대부분의 직장은 호봉 높고 봉급 많던 5060세대부터 몰아냈다. 언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론 현장에서 쌓아 온 지식과 경륜은 하루아침에 용도폐기 당한 채 쓸쓸하게 떠난 언론인들이 많았다. 50대 방패막이가 사라지자 40대 들이 불안을 느끼고, 요즘도 예전 보다 빠른 속도로 물갈이가 이어지고 있다. 변화의 물결 속에서 정년퇴직까지 버틴 기자는 그나마 억세게 운이 좋은 편이다.

퇴직기자들을 줄여 '퇴기'라고 한다. 퇴직이후 허탈감에 빠져 한동안 두문불출하는 퇴기도 있고, 섣부르게 투자를 했다가 퇴직금만 날리는 경우도 보았다. 퇴기들 중에는 화려했던 시절만을 곱씹는 '추억형'이 있는가하면, 지적 충족을 위해 재충전하는 '미래형'이 있고, 필자처럼 어정쩡하게 글품이나 파는 '안주형'이 있다. 주변 퇴기 중에는 서당에 다니며 공맹(孔孟)사상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는 '탐구형'이 있으며, 프랑스 말로 된 이탈리아어 교재로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진취형'도 있어 귀감으로 여긴다. 나이가 들어도 이들의 가슴엔 늘 '희망'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젊은이라도 꿈과 희망이 없다면 '젊은 고물'에 불과하고 늙은이라도 건강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다면 '나이든 보물'이다.

"IMF 때보다 더 심각하다"는 비명이 들릴 정도로 경기침체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외환위기 때 저승사자 같은 존재였던 무디스가 다시 우리에게 다가와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두 단계 내려 금융시장이 벌써부터 요동치기 시작한다.

가계대출 위축에 부동산 하락까지 겹쳐 소비심리는 꽁꽁 얼어붙고, 기업들의 투자도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 판국이니 직장생활이 갈수록 어렵다고 한숨이다. 언제 밀려날지 모르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증권은 곤두박질치고 가계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 가슴은 납덩이가 된다. 직장분위기도 예전만 못하다. 다면평가제 도입도 스트레스 요인이다. 가정에 들어가도 '낯선 손님'같은 소외감을 느낀다는 푸념이 나온다. 근로의욕은 갈수록 떨어지고 노력한 만큼 보상받지 못한 사회구조에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인생역전'을 노려 로또 복권을 구입해도 남는 것은 허탈과 좌절뿐이다. 자신의 삶에 녹아들지 않은 급격한 변화는, 삶 자체를 흔들리게 한다.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허망한 꿈 보다 실현 가능한 소박한 꿈이 오히려 달콤하다.

봄이 열리는 3월이다. 이 땅의 봄은 겨우내 움츠린 사람들의 마음을 화사하게 열어주면서 남녘에서부터 종종걸음으로 달려온다. 옷 벗은 겨울나무들도 기지개를 켜고 새움을 틔운다. 앞다퉈 피는 봄꽃들이 다양한 색깔과 모양으로 자신의 몸매를 뽐내 듯, 직장인들도 새 봄엔 자신의 토양과 색깔에 맞는 희망의 씨앗을 마음의 밭에 뿌리자. 희망의 씨앗에 물을 뿌리며 초록빛 움이 트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는 새 봄을 맞이하자.

- <더 퍼스트 3월호> (2003.03)

이규섭

http://columnist.org/kyoos
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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