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2월 26일 No. 608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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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과 냉정 사이

어느 한시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男兒立志出鄕關(남아입지출향관. 사나이가 뜻을 세워 고향을 떠난 뒤)
學若不成死不還(학약불성사불환. 학문을 이루지 못하면 죽어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리)

예전 대학수험생이나 고시 준비생들이 책상머리에 곧잘 붙여 놓았던 여러 가지 경구 가운데 하나다. 한문을 잘 모르는 지금 세대에게는 이 시구가 그리 절실하게 와 닿지 않을지 모르지만 과거의 젊은이들에게는 뜨거운 열정을 지펴주는 강력한 불씨였다. 그들은 이를 책상머리와 가슴속에 새겨놓고 흔들리거나 꺼지지 않도록 애써 간직했다. 흐트러지기 쉬운 의지를 계속 긴장과 자극 속으로 몰아 넣고 채찍질하기 위해서였다.

인생의 동이 트는 새벽 큰 승부처를 향해 떠나는 그들의 각오는 비장했다. 어떤 이는 學若不成死不還(학약불성사불환)을 所望不成更不還(소망불성갱불환. 소망을 이루지 못하면 고향에 다시 가지 않으리)이라고 고쳐 '학문'이 상징하는 것보다 더 구체적으로 자기의 목표를 밝히기도 했다. 국구주의 일본이 자기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으면서 암송하게 했던 시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온갖 고난을 의미했지만 성공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타향살이를 주제로 한 수많은 가곡, 가요들에 녹아 있는 그리움, 슬픔, 갈망 등이 그 아픔을 대변해 주고 있다.

고향에 돌아가는 방법은 금의환향(錦衣還鄕)과 실의에 빠져 낙향(落鄕)하는 두 가지 밖에 없었다. 비단옷을 입고 당당히 돌아가는 금의환향은 이른바 출세한 사람의 방식이고, 고향 사람들 눈에 뜨일까 인적이 드문 때를 골라 남몰래 조용히 찾아가는 낙향은 실패한 이들의 귀향이었다.

먼동이 트는 새벽 가족의 품을 떠날 때 가슴에 지녔던 비장한 각오가 바로 초심(初心)이다. 그 초심은 누구나 같았다. 그런데 귀향할 때는 이처럼 큰 차이가 난 것이다.

이유는 초심 유지 여부에 있다. 처음의 각오를 항시 잊지 않고 정진했는지 아니면 거기서 벗어나 길을 잃고 말았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 것이다.

'초심으로 (          )'라는 문제를 내놓고 괄호 안을 채우라고 하면 무슨 말이 가장 많이 나올까. 모르긴 몰라도 '돌아가자' 또는 '돌아가라'가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일하자' '노력하자' '정진하라' 등을 넣어 보라. 뭔가 어색하지 않는가. 반면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마치 한 낱말처럼 익숙하게 느껴진다. 그만큼 상투적인 말이 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초심 즉 처음의 각오와 결심은 계속 밀고 나가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초심은 으레 벗어나게 되어먹은 것이다. 벗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이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한시의 구절이 예전 남자 위주의 전통사회 산물이라 '사나이가 뜻을 세워...'운운했지만 이것이 보편적인 인간을 지칭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일을 시작할 때면 어두운 새벽 고향을 떠나듯 단단한 각오를 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도 그렇다.

그러나 인생을 결산하는 귀향 무렵에 보면 천차만별이다. 아니 실의에 빠져 낙향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또한 거의 없을 것이다.

바로 열정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열정은 초심을 유지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에너지다. 열정은 어떤 일에 대한 취향이자 적성이며,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대한 애정이며 욕구이다. 이것이 없으면 그 인생은 살았다 할 것이 없고, 부족하면 필수 영양소 결핍으로 정상적 성장을 하지 못한 동식물과 다를 것이 없다.

초심 시절에는 대부분 이 열정이 넘쳐난다. 언제나 솟아나는 샘물로 착각, 절대 마르지 않으리라는 오만과 망상으로 가득 차 있는 이들이 그래서 많다. 그런 이들일수록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곧 초심을 버리고 딴 길을 헤매기 마련이다.

반면 늘 열정이 넘쳐나면서도 성과가 시원찮은 사람이 적지 않다. 이는 열정이라는 영양소는 과잉인 반면 여기에 동반해야 할 다른 요소들이 부족한 탓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한 가지만으로 성취해낼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없다.

열정에는 이를 조절할 냉정함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고, 자신감, 긴장, 인내, 끈기, 겸허함 같은 요소들이 적절하게 투여되어야 한다. 이들이 열정을 보완해야 목표를 향해 가는 추진력을 균형 분배하고 능률을 올릴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없는 열정은 맹목적이어서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다.

열정 결핍이나 과잉 모두 초심 유지에 걸림돌이 된다. 열정이 식어 초심에서 한참 멀어진 사람은 그걸 다시 길어 올리기 위해 샘을 더욱 깊이 파야 한다. 그것이 바로 행복의 샘이다. 반면 분별 없는 열정으로 뜨겁기만 한 사람은 다른 요소들을 적절하게 주입하여 합리적이고 실천 가능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촉진제만 맞은 나무처럼 전체적 균형을 잃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지 이 같은 보완이 이루어진 다음에 초심으로 되돌아가면 그 인생은 이미 성공으로 진입한 것이나 다름없다.

- 디아지오 코리아(주) 사보 2003년 첫호 (2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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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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