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2월 25일 No. 607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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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치매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 몇잔만 먹으면 몇명이 됐던 한데 어울려 노래를 부르는 기질을 갖고 있다. 여럿이 둘러앉아 함께 노래를 부르면 완전히 외우지 못하는 노래가사도 어느새 자기 것이 되고 자신이 특히 좋아하는 노래는 이른바 애창곡이 된다.

요즘이야 노래방 같은 곳이 있어서 가사를 다 못 외어도 멜로디만 알면 노래를 부르기가 어렵지 않지만 옛날에는 사정이 달랐다. 아무리 좋아하는 노래라도 가사를 모르면 부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여럿이 단체로 박수를 치거나 혹은 젓가락을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를라치면 가사도 쉽게 생각나고 외우기도 쉬웠었다.

90년대 초반쯤에 등장한 노래방이 생긴 이후로는 이런 현상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가사나 음정을 정확하게 몰라도 얼마든지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노래방엘 가면 자동적으로 반주가 나오고 가사까지 화면에 뜨니 그저 보고 따라 부르면 된다. 그래서 웬만한 음치라도 노래방에서는 일류 가수(?) 못지 않은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애창곡마저 노래방에서가 아니면 혼자서 부를 수 없는 경우도 많아졌다.

또 다른 얘기지만 휴대폰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는 집이나 친구의 전화 등 내가 자주 거는 곳의 전화번호를 외워서 쓴 적이 별로 없다. 휴대폰은 단축다이얼 기능이 있어 자기집이나 친구, 친척, 직장 등의 전화번호는 입력을 시켜놓고 필요할 때 한자리나 두자리만 누르면 그냥 통화가 가능해진다. 10자리 안팎의 번호를 따로 기억할 필요 없이 내가 원하는 곳에 전화를 걸 수 있게 된 세상이다.

사실 전화기에 단축번호기능이 없었을 때 우리들은 적어도 10여개, 많게는 수십개의 번호도 머리속에 기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휴대폰이라는 것이 생긴 이후로는 단축번호를 주로 쓰다보니 전화번호를 수십개까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든 게 사실이다.

어쩌다가 휴대폰을 집에 두고 나왔을 경우,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가. 참으로 답답해진다. 휴대폰을 쓰지 못해 불편함을 느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휴대폰이나 공중전화를 이용해도 전화번호가 얼른 생각나지 않으니 전화번호수첩에서 필요한 전화번호를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전화번호수첩마저 갖고 있지 않다면 여간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옛날(?) 같으면 자주 쓰는 전화번호인 만큼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을 법한 전화번호이지만 이제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심한 사람은 자기집 전화번호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아 회사나 친구한테 물어보는 경우도 가끔 볼 수 있다. 이렇듯 우리는 어느새 전화번호에 관한 한 치매현상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망증도 이런 건망증이 있을 수가 없다. 필자의 경우 나이가 점점 들어가다 보니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다. 젊은이들에게도 얼마든지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바로 디지털기기를 자주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디지털치매 증후군이라고 말한다. 컴퓨터나 휴대폰 등 디지털기기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전화번호나 기념일, 중요한 약속 등을 잊어버리는 현상이다.  

이런 증후군은 나이가 든 사람보다 디지털기기에 익숙한 20대나 30대의 연령층에서 더 두드러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심지어 10대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니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사실 디지털기기를 쓰게 되면 복잡한 숫자나 행사날짜 등을 굳이 외울 필요 없이 내용을 입력만 해놓으면 된다. 이런 일들을 디지털기기에 의존하다보니 외우는 것을 기피하게 되고, 그것이 지나치다보면 외워도 금방 잊어버리는 증세가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전화번호 건망증은 디지털치매의 신호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컴퓨터 같은 디지털 기기는 한정돼 있는 인간 뇌의 용량을 확장시켜 주는 고마운 물건이지만 그 뒷면에는 인간의 두뇌능력을 쇠퇴시키는 역작용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 인간은 일종의 위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일본에선 최근 이 같은 증상을 「IT 건망증」이라고 하고, 그런 사람을 「IT 멍청이」라고 부른다. 더욱이 이런 현상을 두고 신종 정신질환으로 분류하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굳이 우리말로 한다면 「디지털치매환자」라고 하겠다.

일상생활에서의 디지털 치매현상을 살펴보면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이 어디인지 갑자기 기억나지 않는 것도 그렇고 같은 사람에게 명함을 두 번 이상 건네거나 전화를 해놓고도 왜 했는지 잊어버리는 것도 디지털 건망증으로 비롯된 증세이다.

특히 인터넷을 하다가도 여기저기 서핑을 하다보면 정작 내가 꼭 들러야 하거나 검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이 나지 않아 답답한 경우가 생긴다. 이 역시 디지털치매의 한 현상이라도 할 수 있다.

계산능력도 마찬가지이다. 전자계산기를 쓰면서부터는 암산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도 느끼고 있는 일이다. 아무리 쉬운 계산이라도 머릿속에서 계산한 것을 믿지 못해 꼭 전자계산기를 사용해야 마음을 놓는 사람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외국사람들이 간단한 숫자계산도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을 보고 웃었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우리가 그런 현실에 부닥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디지털 치매증후군은 디지털기계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됨에 따라 창의적인 뇌운동량이 격감해 생긴다는 것이다. 기억이라는 뇌운동은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한데 각종 디지털기기들에 의해 이런 뇌운동이 급격히 느려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뇌의 정보저장기능을 디지털기기가 대신하다보니 뇌의 기억능력이 점차 쇠퇴할 수밖에 없다. 정말이지 이런 현상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인간의 두뇌가 아주 간단한 정보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컴퓨터 같은 디지털기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태가 이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 2003.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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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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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월간 인터넷라이프 편집인.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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