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2월 18일 No. 603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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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도 쉼표가 필요하다

초고속 인터넷시대에 살면서 가끔 엉뚱한 발상을 해본다. 장죽(長竹·긴 담뱃대)을 입에 물고 합죽선을 부치며 정자에 앉아 한시를 읽던 옛 선비들의 유유자적한 모습을 떠올리며 '삶의 타임머신'을 그 시대로 되돌리면 삶의 여유가 생길 것이 아닌가 하고….

그 시절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어도 덥다고 호들갑을 떨지 않았으며 청량한 자연의 바람에 무더위를 씻어냈다. 한 여름 바캉스를 떠나지 않고도 천렵(川獵)을 하면서 맑고 시린 냇물에 발을 담그며 삼복더위를 피했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풍광처럼 삶이 찌들거나 때묻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은 느린 삶 속에 여유와 여백이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빨리빨리병'은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에서 체질화 됐다는 설이 있다. 제 때 농사일을 하지 않으면 폐농하기 쉬워 서두르다보니 생긴 고질병이라는 것이다. 제때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곡식이 익지 않고, 제 때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홍수나 가뭄의 피해를 입고, 제 때 서둘러 가을걷이를 하지 않으면 추위가 닥쳐 수확량이 줄기 때문이다. '쇠뿔은 단김에 빼야' 속이 후련하고 '우물곁에서 슝늉을 찾듯' 조급하다.

'빨리빨리'문화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우리민족 특유의 부지런함에 가속도가 붙어 세계와의 경쟁에서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이룩했다. 빨리빨리가 아니면 속 터지는 조급성이 인터넷 확산에 불을 붙여 전자정부와 인테넷 가입자 1천만명 시대를 열었다. 디지털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경쟁력의 원천은 결국 빨리빨리에서 비롯됐다.

검은 손은 빨리 씻을수록 좋고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마음 편하다. 그러나 급히 먹는 밥이 체하기 쉽다. 자동차를 과속하면 사고가 나고, 공사를 급히 서들면 부실이 된다. 빨리빨리 서두르다보면 무리수를 두게 마련이고, 무리수는 결국 합리성의 결여와 함께 도덕성을 상실할 수도 있다.

'5분 먼저 가려다가 50년 먼저 간다'는 교통안전 켐페인이 무색할 정도로 한국인의 운전습관은 조급하다.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악셀을 밟고, 학교 앞 좁은 골목에서조차 예사로 클랙슨을 울린다. 아무리 조급하게 차를 몰아도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은 안전운행을 한 운전자 보다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무리하게 운전하다 사고를 낼 확률만 높아질 뿐이다.

부실 공사가 얼마나 엄청난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가를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참사에서 실감나게 경험했다. 무슨 일이던 빨리빨리 서두르고 대충대충 마무리하면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조급한 마음으로 주식을 투자하면 애초에 원한 성과를 거두기가 아주 힘들다. 그런데도 투자자들은 상승국면에서건 하락 국면에서건 조급함이라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항상 느긋하고 여유있는 자세를 가진 투자자만이 험난한 주식시장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전문가의 견해에 수긍이 간다.

우리는 남보다 먼저, 남보다 빠르게 서두르지 않으면 낙오한다는 강박관념속에 숨가쁘게 살고 있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으려니 마음은 급하고 몸은 쉽게 지친다. 조금만 여유를 부리면 뒤지는 것 같아 불안하다. 속도의 대열에서 낙오하면 손해를 보고 생활의 여유를 누릴 수 없으니 누구나 속도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생은 흔히 마라톤에 비유된다. 마라톤은 속도조절이 우승의 관건이다. 힘이 넘친다고 처음부터 질주하면 얼마동안은 앞서 달리겠지만 쉽게 지쳐 곧 뒤지게 마련이다. 평생 가야할 인생의 길에 조급함은 금물이다. 길떠난 나그네가 산천경계를 느긋하게 둘러봐야지 급한 마음에 길만 따라가다 돌아와서야 여행의 보람이 있겠는가.

요즘 고질병처럼 번지는 복권 열풍도 따지고 보면 '인생 역전'을 노린 한탕주의 조급성이다. 땀흘려 벌기보다 단 한번의 기회로 행운을 잡으려는 뜬구름잡기와 같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한다'는 속담이 진부하게 느껴지겠지만 젊어서 땀흘려 노력하는 습관을 길러야 노후가 안정된다. 패기 넘치는 젊은 시절의 영화 보다 노년의 영화가 더 소중한 것이다.

울림이 큰 대종(大鐘)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삼국지 위지(魏志)에 나오는 말이다. 원목을 재목으로 다듬으려면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후한서(後漢書)에 나오는 경구다. 크게 될 사람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대기만성(大器晩成)이다. 마냥 여유를 부리자는 것이 아니라 서두르지 말고 재능을 갈고 닦으라는 의미다.

길을 나서면 지름길도 있지만 인생의 길엔 첩경이 없다. 어차피 주어진 삶의 길목에서 쫓기듯 서두른다고 해서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앞만 보고 무섭게 질주하지 말자. 나만 생각하지말고 이웃도 살펴보자.

문장에 쉼표가 없으면 호흡이 가쁘다. 삶에도 쉼표가 필요하다. 살아가기가 빡빡한 세상, 잠시 삶의 쉼표를 찍고 자신과의 만남의 시간을 가져보자. 삶의 여유가 생기고 느림의 아름다움이 보일 것이다.

- 한국오라클(주) 웹진 <오라시스> 2월호 (2003.02)

이규섭

http://columnist.org/kyoos
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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