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철은 다가오는데…
입춘이 지났다. 서슬 푸른 동장군의 위세도 계절의 변화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폭설과 혹한 속에 올 겨울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봄의 문턱에 들어섰으나 농심(農心)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서서히 농사채비를 서둘러야 할 때지만 마음은 아직 한 겨울이다.
국제유가의 폭등으로 기름값이 올라 시설채소 재배농가는 울상이다. 농어촌 버스요금·수도료 등 공공요금도 줄줄이 인상돼 가계 부담이 늘었다. 인건비·농기자재도 덩달아 뜀박질이다. 그러나 농산물 가격은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지난해보다 떨어져 농가의 시름은 깊어간다.
이제는 농사짓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한숨이 터져 나온다. 아예 농사를 포기하겠다는 농민의 목소리도 들린다. '이차(利差·이자차이)보전' '적자보전' '농가회생자금 지원' '피해보상지원' 등 '보전'과 '지원' 대책이 쏟아져도 시큰둥한 반응이다. '쌀 휴경제 도입'이니 '쌀소득보전직불제'니 하는 다양한 제도에도 믿음을 갖지 못한다. 쌀값 하락분의 80%를 보전해 주는 쌀소득보전직불제에 가입한 농민은 지난해 17만명이 넘는다. 이들은 약정에 따라 소득보전직불 보조금을 받을 수 없게 됐다. 2002년산 쌀값이 2001년산 보다 소폭 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실정이니 누가 소득보전직불제에 선 듯 가입하겠는가.
우루과이라운드(UR)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도하개발어젠다(DDA) 농업협상이 시작됐다. 발등의 불이 떨어졌다. 참깨 등 관세율 500%가 넘는 농산물이 40개, 관세율 200%가 넘는 농산물이 100개가 넘는 한국이 그 관세율을 25% 수준으로 낮추어야 할지 모르는 위기를 맞았다. 낮은 관세율로 일정량의 농산물을 의무적으로 수입하거나, 국내외 가격차만큼 고율 관세를 물리는 대신 수입물량을 제한하지 말거나 제한해야 할 입장이다. 3월이면 농산물 시장개방 폭이 결정된다. 관세감축폭 등에 따라 우리 농업은 UR 때 못지 않은 피해가 우려된다. DDA 협상 결과는 2004년부터 1년간 진행되는 쌀 재협상의 방향타가 될 것이다.
DDA농업협상뿐 아니라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도 농민들에겐 두려움이다. 비록 그 직접적인 피해는 과수농가에 그칠지 모르나 그들이 채소류나 다른 특용작물 재배로 전환할 경우 농촌에 미칠 여파는 마찬가지다.
이제까지 농정은 정치논리에 휩쓸려 땜질식으로 운영돼 왔으나 이젠 피할 수 없는 일대전환기를 맞았다. 이제까지 농정기조는 증산과, 가격지지를 두 축으로 하고, 관세장벽을 높이쳐 우리 농업을 보호해 왔으나 이제는 한계에 이르렀다. 보호정책에서 경쟁적 농정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시점이다.
농산물 시장개방은 세계화의 대세다. 우리 상품을 해외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서는 우리 시장도 개방해야 한다는 것쯤은 농민들도 잘 안다. 농민 여론이나 '표'를 의식해 '쌀 관세화' 유예 원칙을 고수한다는 어정쩡한 자세로는 해결책이 나올 수 없다. 1992년 김영삼 전대통령은 쌀 개방저지에 대통령직을 건다고 했으나 쌀 시장은 개방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농가부채 탕감을 약속했으나 농민들은 농가부채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도 "쌀 문제를 임기 중 반드시 해결하겠다"며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농림예산을 국가예산의 10%로 하고 이 중 20%를 직불예산으로 쓰겠다"는 공약도 했다. 국가예산의 10%를 농림예산으로 배정하면 지금보다 1조원 정도 예산이 늘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직불예산을 농림예산의 20%로 하면 지금까지 소비자가 누린 혜택을 유지하면서 농민들의 소득 안정을 기할 수 있다니 기대를 걸어 본다.
국제통상 여건상 쌀 문제에서 만족할 만한 해법은 없다. 정치권은 물론 정부와 농민단체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중지를 모아야 할 때다. 줄줄이 이어지는 통상협상에 대한 대응 전략은 물론, 개방으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농업부문에 대한 보상과 지원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 급선무다. 소득보전직불제라든가 재해보험, 사회보험 등 많은 대안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재원확보와 지원 대상과 지원 폭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조정해 나가야 할 것이다.
- <담배인삼신문 2월7일자> (2003.02)
이규섭
http://columnist.org/kyoos
시인·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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