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2월 4일 No. 594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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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과 쪽박

미국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1백만 달러(약 12억 원)를 벌 수만 있다면 '가족도 버릴 수 있다'와 '믿음을 버리겠다'가 각 25%로 나타났다. 다음은 '매춘이라도 하겠다(23%)', '배우자를 버리겠다(16%)', '살인자를 위해 위증도 할 수 있다(10%)' 순이었고, '살인이라도 할 수 있다(7%)'와 '아이들을 다른 사람에게 입양시키겠다(3%)'라는 섬뜩한 응답도 있었다.

돈의 위력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모질고 악해질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 단면이라 하겠다. 한국인들이라면 어떨까? 가치관의 차이로 응답의 양상은 다르겠지만 돈을 숭배하는 정도는 미국인들에게 크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복권 열풍이 매우 뜨겁다. 로또복권 당첨액이 잇달아 사상최고액을 경신하면서 그 불길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복권판매소들은 복권에서 '인생의 역전승'을 노리라며 부추기고, 열심히 일해야 할 직장인들마저 40% 가량이 복권을 통한 대박의 꿈을 쫓는다고 한다.

주말에 경마장이나 경륜장 부근의 지하철역 분위기는 긴장감과 기대감으로 팽팽하다. 눈에 핏기가 서린 사람, 여차하면 싸움이라도 할 것처럼 강파른 표정을 한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꿈을 찾아 한판 붙으러 가는 이들의 도전적인 표정, 또 한번 허탕을 치고 씁쓸히 돌아서는 분노의 얼굴은 일반승객과 확연히 구분이 된다.

복권은 경마장이나 카지노처럼 한 장소에서 승패를 가르지 않기 때문에 살벌한 기운이 덜 할지 모르지만 곳곳에서 개개인이 토해내는 희망과 분노의 열기도 만만치 않다. 건전한 오락이어야 한다는 당초의 취지는 거의 찾을 수 없다. 복권을 사지 않은 사람들도 거액 당첨 뉴스를 접하고 나면 살맛, 일할 맛이 이 싹 가시고 마니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지난 한해 카지노 복권 경마장 등지에서 대박의 꿈을 쫓으며 날린 비용이 16세 이상 국민 1인당 32만원 꼴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몇이나 인생역전을 이루었을까. 그보다는 대박 대신 쪽박 찬 사람들을 찾는 것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편의점에서 복권 1만여 장을 훔쳤다가 지난해 7월 검거된 사람과 역시 6만여 장을 훔친 혐의로 최근 구속된 절도범 모두 그 많은 복권 가운데서 1만원 이상 당첨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대박의 꿈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한탕심리에 젖은 많은 이들이 지금 너도나도 불을 찾아 덤비는 부나비들처럼 곳곳에서 날개짓이다. 자칫하면 돈은커녕 자기 몸만 송두리째 탈 수도 있는데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는다. 돈 앞에서 한없이 왜소해지는 우리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경기 침체는 몇 년째 이어지고 사회불안 요소 역시 여기저기 잠복해 있는 상황이다. 거기에 이처럼 한탕을 노리며 꿈속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으니 이 사회의 건강상태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 삼성 웹진 <인재제일> 1.2월호 (2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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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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