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2월 3일 No. 593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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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일 [그해오늘은] 대지월(大地月)



1966년 오늘 낙선재에서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보살'이 숨진다. 왕궁의 한 구석에서 웬 보살이냐고 놀랄 일은 아니다.

그는 조선조 마지막 왕인 순종의 계후인 순정효황후 윤씨로 유릉에서 순종과 합장된다.

불교를 배척하던 조선조의 마지막 황후가 불교도로 삶을 마친 것이 그렇듯 윤씨의 생애에는 막바지에 이른 왕조의 온갖 모순과 역리가 집약된 셈이다.

1904년 순종의 첫부인 민씨가 죽자 2년뒤 그가 세자빈으로 간택된 과정이 우선 그렇다.

민비가 왜군들에게 참살당한지 10년도 넘어 왕실은 이미 거덜났으나 세자빈의 간택을 둘러싼 싸움은 치열했던 것이다.

그 싸움에서 그의 큰 아버지로 훗날의 악명높은 친일파인 윤덕영이 이긴 셈이다.

그리고 이듬해 일제에 의해 고종이 쫓겨난 덕에 윤씨는 황후가 되나 그 세월은 3년을 넘기지 못한다. 왕조의 명운이 끊어져 그는 '이왕비전하'로 강등하고 그 과정에서 앞장선 것도 윤덕영이었다.

윤씨가 국권피탈을 논의하던 마지막 어전회의를 병풍뒤에서 엿듯고 옥새를 치마에 감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16세의 '소녀'가 아니라도 조선땅을 감출 수는 없어 그는 큰아버지의 위협에 옥새를 내논다.

그 덕에 윤덕영은 자작이 돼 영광과 오욕의 삶을 걸으나 그와 피를 나눈 윤씨가 올바른 행실로 칭송이 높은 것도 인간살이의 역리다.

그가 6.25때 낙선재에서 인민군들에게 "여기는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고 호통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뜻밖의 '복병'을 만난 인민군이 물러난 낙선재는 '해방구안의 또 다른 해방구'가 됐다.

하지만 그 모든 제행(諸行)도 대지위에 뜬 달이 차고 기우는 것처럼 무상하니….


- 세계일보 200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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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평 (梁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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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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