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1월 30일 No. 590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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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가게, 그리고 `밥 한끼´


우리 동네에 반찬가게가 생겼을 때 뛸 듯이 기뻤다.일하다가 끼니때를 놓치고 늦게 퇴근할 때의 부담감이 사라지게 됐기 때문이다.그 편리함이란 정말 환상적이었다.게장,콩장,나물 등 온갖 밑반찬에 미역국,시래기 된장국,육개장 등 매일 다른 종류의 국을 끓여 내놓고 갈치조림,고등어 조림에 생선전,잡채,야채 샐러드 등 먹음직스러운 밥상을 차릴 수 있는 모든 것이 그곳에 있었다.

일찍 퇴근한 날도 “오늘은 무슨 반찬이 나와 있을까” 궁금해 하면서 반찬가게에 들르곤 했다.나 같은 사람들이 많은지 그 가게는 쏠쏠히 장사가 되는 듯했다.인기 있는 반찬은 일찍 품절돼 늦게 퇴근하는 경우가 많은 나는 거의 살 수 없었다.

사실 반찬을 만들어 먹기보다 사 먹는 것이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 더 이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애써 만든 반찬도 식구들이 먹는 양보다는 버리는 양이 더 많을 때가 잦고 음식 재료도 이것저것 사 놓았다가 못쓰고 버리는 경우가 많다.그 값으로 여러가지 반찬을 조금씩 사 먹으면 훨씬 편리하고 경제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몇달이 지난 지금 반찬가게를 찾는 내 발걸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아무리 가정식으로 조리한다지만 집에서 만든 반찬과는 맛이 다르기 때문이다.우리집에서는 인공조미료나 설탕을 반찬에 넣는 것을 싫어 하는데 반찬가게로서는 많은 사람들의 입맛을 맞추어야 하니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인공조미료나 설탕이 문제라기보다는 김 빠진 음식에 물린 탓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소설가 박완서씨는 어느 글에서 이 ‘김’을 아주 적절하게 정의하고 있다.“요컨대 하숙밥이나 눈칫밥은 김이 나간 밥이라는 소리인데 그런 경우의 ‘김’이란 사전적인 의미의 김-즉 음식의 따뜻한 기운이나 음식 본래의 제맛-보다 훨씬 깊은 뜻,그 음식을 만들 때 들인 정성이 녹아 들어 만들어 낸 음식의 기(氣)같은 걸 뜻하는 것”이라고.

남북 이산가족 상봉 자리에서는 오랜만에 만난 가족에게 ‘밥 한끼 못해 먹이는’ 안타까움이 어머니와 아내,누이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곤 한다.그들이 오매불망 그리던 아들이나 남편,오라버니들과 만나 호화로운 식당에서 진수성찬에 가까운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도 손수 지은 밥 한끼를 대접하지 못하는 것을 서러워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바로 김 빠진 음식에 대한 안타까움이다.그들에게 ‘손수 지은 밥 한끼’란 육친에 대한 절절한 마음과 사랑의 최소한의 표현인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얼마전 주한 미 상공회의소와 주한 유럽연합(EU) 상공회의소 공동초청 경제정책 조찬 간담회에서 “여러분은 지금부터 저와 한 식구”라며 친근감을 표시했다.“우리 한국에서는 식사를 같이한다는 것이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밥을 같이 먹는다는 뜻에서 가족을 먹을 식자에 입 구자,식구라고도 말합니다.”라고 설명하면서 그렇게 말했다.밥상 공동체에 대한 우리 민족 특유의 정서를 함께 나누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밥상 공동체는 무너져 가고 있는 듯싶다.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식탁에 둘러앉는 날이 일요일을 빼고는 드문 경우가 많다.일요일 모처럼의 가족시간도 외식으로 해결하는 가정이 많아 외식산업은 날로 번창하고 있다.맞벌이 가정,독신 가정의 증가와 함께 반찬시장은 연간 5000억원 규모에 이르고 햇반 등 즉석밥 시장 규모도 600억원대를 넘어섰다.그동안 중소 기업 영역이었던 반찬시장에 지난해부터는 대기업이 뛰어들었다.분당 등 신도시를 중심으로 매일 아침 국과 반찬을 배달하는 서비스업도 최근 몇년 사이 급성장하고 있다 한다.

내일 모레는 설이다.민족 대이동이 시작되고 전통적인 밥상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다.그러나 반찬시장과 외식산업의 번창을 보면서 앞으로 명절의 따뜻함,손수 지은 밥 한끼의 정성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염려스럽다.

- 대한매일 6면 <임영숙 칼럼> 2003.01.30

임 영 숙
http://columnist.org/ysi
대한매일 미디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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