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1월 30일 No. 589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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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과 토정비결

한국의 최장기 베스트 셀러로 4백여 년 간 군림해 온 '토정비결(土亭秘訣)'은 조선 중기 포천과 아산의 현감을 지낸 이지함(李之菡 . 1517-1587)이 저술한 도참서(圖讖書)다. '토정'은 그의 호이며 '비결'은 도참 즉 길흉에 관한 예언을 담았다는 뜻이다. 그의 저술이 아니라는 설도 있지만 그 사실여부를 밝히는 작업은 학자들의 몫이므로 일반시민들은 거기에 굳이 구애받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토정비결은 근년에 들어와서 영향력이 많이 쇠퇴했지만 40-50년 전까지만 해도 그 위력은 대단했다. 특히 농어촌 주민들이 절대적 신뢰를 보냈고 도회지에서도 그에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마을이나 이웃에 토정비결을 봐 줄 수 있는 사람은 꼭 한 사람쯤 있기 마련이었고, 한해 신수를 보는 것은 필수였으므로 정초가 되면 그의 집은 그야말로 문전성시였다.

토정비결을 보기 전 주민들은 시험 치른 뒤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학생들처럼 긴장했고, 결과에 따른 희비의 엇갈림은 자못 심각했다. 점괘가 좋게 나온 사람은 입이 벌어지면서도 혹시 잘못하면 부정을 탈지 모른다고 여겨 표정관리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 반면 나쁘게 나온 사람은 근심으로 풀이 죽었고 어떻게 하면 액운을 피할까 고심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토정비결이 꼭 맞는 것은 아니라며 여러 가지로 위로를 해주었다. 물자가 귀해 토정비결 책이 드물던 때라 사람들은 자신의 점괘를 열심히 베껴서 간직하고, 여기에 비추어 말과 행동을 삼가거나 일을 추진했다.

요즘에는 예전 사람들처럼 연례필수행사로 토정비결을 보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어쩌다 보아도 대부분 심심풀이 삼아 재미로 보는 정도다. 그래도 서울의 탑골공원 등 전국 각지의 점쟁이 골목에서는 양력 연말연시와 설날 대목을 맞아 역술인들이 토정비결 책을 잔뜩 쌓아놓고 손님을 부른다. 연인 또는 친구들끼리 길을 가다 들리는 손님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온라인에 밀려 경기가 예전 같지 않다며 어두운 표정들이다. 인터넷에서는 한번 보는데 대개 2,000원인데다 번거롭지 않으며, 자신의 점괘를 프린터에서 뽑을 수 있다. 이에 비해 길거리에서 보는 비용은 약 3,000원이며 점괘도 책에서 찢어주므로 산뜻한 맛이 덜하다. 한 마디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소비자도 아날로그 고객으로 차츰 한정되어 가는 통에 고전을 면치 못한다. 그래도 온라인을 찾는 디지털 고객까지 합하면 토정비결의 인기는 아직도 만만치 않다 할 수 있다.

토정비결은 그 해의 간지(干支)와 갑자·을축과 같이 다달이 배정된 월건(月建) 그리고 날의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숫자로 푼 뒤 이를 셈하여 한 해 신수(身數)를 보는 것으로 사서삼경의 하나인 '주역(周易)'이 모태다. 고대사회에서는 주역과 천문학이 앞일을 점치는 주요 분야였는데 이지함이 여기에 뛰어나다는 소문이 나자 자신의 운세를 말해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를 계기로 태어난 것이 토정비결이다.

주역이 연(年), 월(月), 일(日), 시(時)를 조합해 총 424개의 괘로 구성된 반면 토정비결은 시를 제하기 때문에 괘가 144개에 지나지 않는다. 즉 주역으로 보면 한국인 4천7백만 명의 운세를 424개로 분류할 수 있고, 토정비결은 144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올해 토정비결상 운세가 자신과 같은 사람이 전국에 자그마치 30여만 명이나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므로 토정비결의 풀이내용은 추상적, 포괄적, 상징적일 수밖에 없다. 이어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 식이다. 토정비결뿐만 아니라 모든 예언서들이 이 같은 두루뭉수리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수많은 사람들의 경우를 같은 점괘로 풀어낼 방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설명은 한문 4언시구(四言詩句)로 이루어지고 그 밑에 한 줄로 번역되어 읽기 쉽다. “뜰 앞의 난초 향기가 아름답다 ”"만일 귀인을 만나면 뜻밖에 성공한다"“서쪽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마라. 재물 때문에 마음 상한다"“서로 다투지 마라. 시비와 구설이 있다" "주색을 가까이 하지 마라. 혹 횡액이 있다" "목마른 말이 산에 올라가니 물이 없구나" 식으로 좋거나 나쁘거나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또 누구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어서 자신에 맞추어 해석하고 자기 좋을 대로 판단해도 나무랄 이유가 없게 되어 있다.

그래서 주역이나 토정비결을 터무니없는 점술서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점술서 기능은 부차적인 것이고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처세의 지침서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하겠다.

주역과 토정비결은 음양의 이치를 기본으로 하여 하늘과 땅의 이치, 그리고 그 속의 조화와 변화를 통해 인간의 행동방향과 목표를 제시한다. 인간의 생활과 세상의 모든 일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복이 있으면 반드시 액운이 따르고, 불행이 있으면 곧 이어 행복이 온다는 점을 경고하고 일깨워 준다. 올라가면 내려오게 되어 있고, 성하면 언젠가 쇠하며,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만나게 되어 있는 자연과 세상의 이치를 자각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평범하지만 인간이 잊고 살기 쉬운 점들로 욕심과 지나침을 자제하고 자연만물과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겸허한 자세로 살아가라는 메시지가 괘마다 강조되어 있다.

바꿔 말하면 점괘가 좋다고 그것만 믿고 노력을 게을리 하거나, 나쁘다고 지레 포기하지 말고 언제나 마음가짐을 단단히 하여 좋은 방향으로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 가라는 당부를 한다. 절망에 빠진 사람은 희망을 갖게 하고, 좋은 점괘만 앞세워 분수없이 나대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다.

주역과 토정비결의 이러한 메시지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결코 케케묵은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정신 없이 살아가는 나날의 틀 속에서 한번쯤 조용히 빠져나와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속도와 방향을 성찰하고 재고하도록 안내해 준다. 이런 각도에서 토정비결을 보면 자신도 몰랐던 삶의 활력을 새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토정 이지함이 토정비결을 저술한 최종 의도도 여기에 있다.

- 정보통신부 '디지털 포스트' 2월호(2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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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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