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3년 1월 18일 No. 579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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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선에 선 당신에게

어느 군부대 연병장에서 뒤엉켜 달리던 병사 1백여 명의 무리가 100m 트랙 7, 8 바퀴를 돌면서 대강 정리되었다. 체력 단련 겸 포상이 따르는 4000m 달리기로 중대 당 20명씩 출전한 것인데 이때부터 20여명이 선두그룹으로 나서고 탈락자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른 주자들보다 두어 바퀴 떨어져 남의 시선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달리는 한 사병이 응원단의 눈에 들어왔다. 명색이 시합인데 차라리 포기하지 그 꼴이라니....

그는 그 부대에서 유명한 고문관(행동이 어수룩하고 실수가 많은 사병을 일컫는 군대 은어) K상병이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애물덩이였다. 그런 그의 출전 자체가 코미디였다. 시간이 갈수록 더 쳐지고 여기저기서 야유가 쏟아졌지만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우스꽝스런 주행을 계속했다.

야유와 웃음소리도 시들해질 때쯤이었다. 이제는 조금 전과 다른 시각으로 K상병을 주시하는 눈들이 늘어났다. 결승점이 가까워지면서 탈락자가 늘어나자 달팽이 같은 그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두드러진 것이다. 그를 응원하는 소리까지 나왔다.

그리고 일이 벌어졌다. 그가 열서너번 째로 결승테이프를 끊은 것이다. 페이스 조절에 실패한 주자들이 많이 낙오한 덕분이었지만 그건 분명 이변이었다. 중대장은 입상은 못했지만 이 고문관이 끝까지 달려 군인정신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줬다는 치사까지 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남들과 달리기 경쟁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군인정신 같은 것 역시 거리가 먼 얘기다. 시합 전날 선임하사가 나를 살짝 불러 출전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을러댔다. 그리고 중간에 탈락하더라도 최소한 20바퀴는 넘겨야지 그렇지 않으면 죽을 줄 알라며 겁을 주었다.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마찬가지인 처지였다" 구타와 기합이 낭자하던 시절의 군대라 선임하사 지시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출전했다.

그러나 막상 출발점에 서니 생각이 달라졌다. 어차피 남보다 앞서서 달릴 수는 없는 것, 대신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순위를 의식하지 않고 자기 페이스대로 달리면 20바퀴는 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남들이 입상을 위해 죽어라 뛸 때 자기는 평소 구보수준으로 달려 선임하사와 한 약속만은 지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마치 연병장에 자기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모든 시선을 무시하고 달리고 달렸다. 그러다가 20바퀴를 넘자 완주할 수도 있다는 자신감과 오기도 생겼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과 선임하사 아니 전 부대를 이겨낸 것이다.

출발점이란 이런 곳이다. 평소 내면 깊숙이 숨어 있던 각오와 자신감, 가능성 등이 분출하여 자신을 재창조하도록 자극하는 곳이다.

그런 출발점에 우리는 지금 다시 섰다. 새해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동안 숱하게 달려 보았던 트랙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K상병처럼 완주하기 보다 중도 탈락했던 경험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면 올해는 어떻게 달릴 것인가. K상병이 그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는 우선 타의에 의해 제공된 상황이었지만 여기에 끌려가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대처해서 그 상황을 자기가 장악하고 통제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주자들끼리 치열한 선두 경쟁을 해야 하는 시합이지만 이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따로 설정한 것이다. 먼저 선임하사와의 약속 이행에 중점을 두었고 나중에는 자신의 극복까지도 추가했다.

방법 또한 독자적이었다. 상대를 이기려면 남들처럼 전력 질주해야 하지만 그건 자신의 능력 밖이었다. 반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자기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누가 뭐라든 구보수준의 페이스를 유지하기로 한 것이다. 즉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상황을 자기에 맞추어 디자인한 것이다. 연병장에 자기 밖에 없는 것처럼 뻔뻔스럽게 달릴 용기가 그래서 생겨났다.

그렇게 목표를 향해 가면서 그는 긴장과 이완을 적절히 구사했다. 자기의 참모습을 한번 보여주겠다는 각오 아래 잔뜩 긴장하면서도 일차적인 목표(20바퀴)는 달성한 다음부터는 중도 탈락하더라도 괜찮다는 여유를 가지고 주행을 했다. 그것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가져온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새해를 맞으면서 나름대로 목표를 설정한다. 그리고 긴장과 흥분 그리고 약간의 불안감을 지니고 출발선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출발신호가 떨어지기 전에 다시 한번 점검해 보자.

올해의 경주는 내가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를 분명히 파악하여야 한다. 아니면 남의 등쌀에 밀리다가 실패로 끝나기 쉽다.

그러려면 목표가 정확해야 한다. 실천 가능한 목표를 소박하게 세우고 거기에 맞는 방법을 구사해야 한다. 능력 이상의 무리한 목표는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게 된다. K상병처럼 겸손하고 소박한 목표를 세운 뒤 자기 체질에 맞는 방법으로 꾸준히 여유를 가지고 시행해 나가야 한다. 그러면 모두 무난히 결승점에 도달할 것이고 이것은 자신의 재창조에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또 그 사병처럼 자신도 전혀 몰랐던 잠재력 발견 등 예상 밖의 성과도 거둘지 모른다.

- 한국오라클(주) 사보 웹진 '오라시스' 1월호 (2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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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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