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12월 27일 No. 570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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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정의 틀 바꿔야 산다

시론 '땜질식 농정 이젠 그만'(본보 2002년 11월8일자)을 읽었다는 독자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그 독자는 수해가 극심했던 강릉지방 수재민들이 엄동설한 컨테이너에서 겪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다고 전제하며, 추곡수매 선급금 상환 걱정에 이중고를 겪고 있다는 지적에 공감한다는 것이다. 수마에 논밭을 잃고 피해보상 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가운데 상황기간은 촉박하여 걱정이 태산같다고 한다. 농민들이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는 마음으로 정부는 상환기간을 없애주거나 면제해주기를 간곡하게 호소하고 있다.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앗아간 수마의 상처를 치유할 겨를도 없이 겨울을 맞은 수재민들의 한숨은 마른 삭정이처럼 메마를 것이다. 강원도 내에서만 1,500여가구의 수해민들이 5평 남짓한 컨테이너에서 겨울을 날 처지에 놓여 있다. 특히 독거노인들은 누군가의 지원이 없으면 겨울을 나기는커녕 당장 먹고살기가 힘든 형편이라고 한다.

KBS 1TV 수요기획 '수해 그 후'는 컨테이너에서 생활하고 있는 수재민들의 일상을 생생하게 담았다. 수해가 그들의 삶에 끼진 충격과 절망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새삼 일깨워 준 프로였다. 집마저 잃고 컨테이너마저 얻지 못한 어느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새로운 이산가족이 돼 버렸다. 강원도 일대의 수재민들에게 수해는 완료된 상황이 아니다. 지금도 그들은 수해와 싸우고 있다. 컨테이너 속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면서도 "그래도 살아 봐야지 죽을 수는 없잖은가…"라는 독백이 가슴 찡한 울림이 되어 눈시울을 적셨다. 아울러 사상 최대의 이번 수해가 인재(人災)인가 天災(천재)인가에서 출발하여 수해관리 시스템의 문제 제기와 함께 재발방지를 위한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올 여름 수해이후 수재의연금은 1,296억원이 모였지만, 강원도 지역의 피해액이 2조원이니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다. 정부는 저리융자로 수재민을 돕겠다고 하지만, 농가부채가 평균 1억원인 현실에서 은행에 손을 벌리기가 쉽지 않다. 정부의 '선 복구 후 지원' 원칙도 그들에겐 족쇄다.

이런 가운데 정부여당은 이자가 12.5%인 상호금융 자금을 쓰고 있는 농어가에 가구당 1,000만원까지 지원하고, 정책자금에 대한 상환을 1년간 연기하겠다는 농가부채 경감대책을 내놓았다. 10조원이 투입되는 이 조치로 146만 농가중 115만가구가 혜택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15만여 가구로 추산되는 연체농가는 담보를 제공하거나 농림수산업자신용보증기금(농신보)에서 보증을 해야 하기 때문에 혜택을 누릴 수 없는 딱한 처지다. 이 조치에 대한 전국농민회총연맹측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부채경감 조치로 가구당 돌아오는 혜택은 50만원 수준이라며, 농가부채를 장기저리로 전환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농림부의 새해 예산 항목도 시장개방 파고(波高)에 시달리는 국내 농업의 심각한 상황을 반영하듯 '이차(利差·이자차이)보전' '적자보전' '농가회생자금 지원' '피해보상지원' 등 '보전'과 '지원' 관련 사업이 유달리 많다. 쌀값 하락에 따른 농가피해를 보상하기 위한 예산은 1조 2,229억원으로 올해 쌀수급안정대책 관련 예산의 두 배 가까이 증가한 규모다.

정부가 우루과이라운드(UR) 타결 이후 10년 동안 농어촌 구조개선을 위해 무려 50여조원을 투입해왔으나 경쟁력 강화에 중점을 둔 농업정책은 결국 한계를 드러냈다. 농업인구의 급속한 노령화와 계속되는 이농(離農)으로 농촌의 적응력은 크게 떨어졌다. 이런 가운데 영농의 대형화를 통한 생산비절감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땅값은 비싸고 노임은 높아 수입 농산물과의 가격 경쟁은 무리였다.

농정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일대 전환의 시기를 맞고 있다. 차기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을 시작해야 할 판이다. 낮은 관세율로 일정량의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하거나, 국내외 가격차만큼 고율 관세를 물리는 대신 수입물량을 제한하지 말거나 제한해야할 입장이다. 정치논리에 휩쓸려 농정을 땜질식으로 대응하면 악순환만 되풀이된다. 거시적 안목에서 구조조정을 통해 농정의 틀을 완전히 바꿔나가야 한다.

- <담배인삼신문> 200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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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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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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