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12월 25일 No. 568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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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창극의 현대화 '다섯 바탕뎐'

몇 년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미녀와 야수'를 관람한 적이 있다.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무대와 웅장한 스케일, 스피드한 장면 전환 등에 매료되어 진한 감동을 받았다.

지난 11월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서 공연된 전통창극 '다섯 바탕뎐'은 시공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무대 구성과 화려한 연출이 돋보여 창극의 현대화를 실감케 했다. 객석까지 튀어나온 돌출무대를 통해 창극의 원형인 판소리가 갖는 현장감을 충분하게 살려냈다.

창극은 아직도 일반인에게 친근한 공연 장르는 아니다. 그러나 이번 공연은 우리 고유의 예술인 판소리를 현대적인 무대예술로 발전시켜 우리 소리에 무관심했던 대중들에게 우리 소리의 멋과 맛을 느끼게 해준 무대였다. 특히 창극 100주년과 국립창극단 창단 40주년을 기념하는 무대여서 그 의미가 크다.

창극 100년…국립창극단 창단 40주년 무대

창극(唱劇)이란 연극처럼 여러 명의 등장 인물이 등장, 각자 맡은 배역에 따라 연기를 하면서 판소리를 하는 연극적 판소리다. 서양의 오페라나 뮤지컬과 비슷한 형식이다. 최초의 창극은 1902년 가을, 고종 즉위 40년 경축행사를 위해 신식 극장인 협률사(協律司)를 설립하고 공연을 준비했다. 협률사는 서울 광화문 새문안교회자리(야주현·夜珠峴)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극장으로 로마식 건축양식에 500여석 규모의 계단식 관람석을 갖추었다.

경축행사 칙명을 받은 김창환 명창은 송만갑·이동백 명창 등과 함께 전국의 남녀 명인·명창을 불러들여 '춘향전' 공연을 준비했다. 김창환은 풍랑(風浪)의 한말, 설움과 오욕과 통분의 시절을 소리와 창극으로 민중들의 한과 슬픔을 어루만졌고 이날치 이후 서편제의 법통을 고스란히 떠받들어 온 명창이다.



그러나 한국 연예계 최초의 변혁인 창극 공연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 해 콜레라가 전국에 번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년이 들었으며 일본·러시아 등 아시아 열강들의 외교적 분쟁으로 고종 등극 40년 행사가 무산됐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1903년 가을 강용환에 의해 '춘향전'이 공연됐다. 이때의 창극은 무대 천정에 전등을 밝히고. 배경으로 둘러친 하얀 포장 앞에서 여러 소리꾼들이 둘러서서 각자 맡은 배역의 소리를 하는 정도였다. 이러한 양식은 1930년까지 이어졌다.

1903년 협률사(協律司)는 협률사(協律社)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운영 주체도 정부에서 민간의 손으로 넘어가 사설극장으로 탈바꿈됐다. 협률사는 1906년 공연장의 풍기 문란을 이유로 폐관됐으나 실질적 이유는 극장에 모여 함께 어우러지는 우리민족의 응집력을 두려워 한 일본의 계책에 의한 것이다. 이 때는 서양의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면서 개방화 물결이 일기 시작했고, 연희(演戱)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높아 전용극장의 설립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신소설 '혈의 루'를 쓴 이인직(李人稙) 등이 중심이 되어 협률사를 연희장(演戱場)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1908년 정부의 인가를 받았다. 원각사(圓覺社)로 명칭을 바꾸고 김창환이 주석(主席)이 되어 창극활동을 주도했다. 이 때를 전후하여 광무대(光武臺)·단성사(團成社) 등의 연극전용극장이 기존 건물을 개조하여 문을 열었다. 새롭게 단장한 원각사는 주로 신극만을 공연하게되자 생업에 위협을 받은 협률사 전속 창극단원들은 지방 순회공연을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한말의 국운과 함께 숱한 풍운을 겪은 원각사는 1914년 봄, 화재로 소실됐다. 새문안교회 앞 신문로에는 원각사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본격적인 창극은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가 결성되고 나서부터다. 1935년 독지가의 재정적 후원에 힘입어 정정렬 편극의 '춘향전'을 무대에 올렸다. 이 때의 창극은 무대 조건을 제대로 갖추고 새로운 대사를 많이 삽입하여 연극적인 요소가 가미됐다.

1936년에는 조선성악연구회 직속으로 '창극좌'를 두었고, 창극좌는 194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기까지 여러 편의 창극을 공연하여 히트시키면서 창극의 전범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창극은 '춘향가' 등 전통 판소리의 사설과 가락을 그대로 살려서 부르는 판소리계 창극과 '장화홍련전' '만리장성' '햇님 달님' 등과 같이 대본을 새로 지어 판소리 가락에 얹어 부르는 창작 창극이 있었다.

8·15광복 후에는 배역을 여성들만으로 구성한 여성창극단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공연작품도 전통 판소리를 벗어나 설화나 야사, 야화 등으로 내용이 확대되었다. 레퍼토리가 전통 판소리를 벗어나면서 명칭도 '여성국극'으로 바뀌게 된다. 여성국극도 1958년을 고비로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60년대에 이르러 대부분 사라졌으나 최근 올드 펜들을 위한 기획공연이 가끔씩 무대에 올려져 관심을 끌고 있다. 1962년에 창단 된 국립창극단은 40년 동안 100여 편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창극의 발전과 보존의 자양분이 됐다.

구성지고 맛깔스런 '명 장면 명 대목'

걸쭉한 판소리에 드라마를 덧댄 국립창극단의 '다섯 바탕뎐'은 판소리 다섯 마당인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가운데서 가장 구성지고 맛깔스러운 명 장면의 명 대목만을 골라 무대에 올린 '창극 눈 대목 모음'이란 점이 이번 무대의 두 번 째 특색이다.

첫 무대인 '춘향가'에서는 '기생점고' '십장가' '어사·장모 상봉 장면'으로 이어졌으며 특히 '옥중가' 중 '쑥대머리' 대목은 언제 들어도 구성지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 옥방 찬서리에 생각느니 임 뿐이라, 보고 지고 보고 지고 한양낭군 보고 지고…'로 시작되는 쑥대머리는 옥중가의 백미(白眉)다.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고 감옥에 갇혀 헝클어진 춘향의 머리칼을 쑥대머리에 비유한 대목으로 임방울 명창의 소리가 가장 심금을 울리는 절창이다.

'흥보가'는 '가난타령'에서 시작하여 '박타는 대목' '놀보가 화초장 짊어지고 가는 대목'으로 구성했으며 놀보 역의 조통달 명창과 흥보처 역의 신영희 명창의 질팍한 연기가 돋보였다.

'수궁가'는 자라의 꾐에 빠져 수정문 앞에 도착한 토끼가 재치와 지혜로 수궁을 빠져 나오는 대목으로 구성됐다. 왕년에 토끼역으로 명성을 날렸던 남해성 명창이 다시 맡아 앙증맞은 토끼역을 능청스럽게 소화했다.

'적벽가'는 조조가 적벽강에서 패한 후 호로곡으로 도망가서 '군사점고하는 대목'에서부터' 관운장이 조조를 놓아주는 대목'으로 이어졌다. 안숙선 명창이 도창(導唱)을 맡아 '적벽강 불지르는 대목'으로 판을 열어주었다. 도창이란 드라마의 나래이터와 같은 역할이다.

'심청가'는 '행선전야' 와 '심청이 팔려 가는 대목'과 '황성 맹인잔치·부녀상봉'장면 위주로 도창을 적극 활용하여 짧은 전막 창극을 시도했다. 심청역을 맡은 안숙선의 애원성은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 절창이다. 심봉사 눈뜨는 대목에서 박수 갈채를 보내는 관객들을 보면서 시대가 변해도 민중의 의식은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한 무대서 펼친 일곱 명창의 농익은 소리

마지막으로 이번 공연은 우리 시대의 쟁쟁한 일곱 명의 판소리 명창들을 한 무대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박송희(75·'흥보가' 중요무형문화재) 성우향(70·'춘향가' 중요무형문화재) 오정숙(67·'춘향가' 중요무형문화재) 남해성(67·'수궁가' 중요무형문화재 후보) 신영희(60·'춘향가' 중요무형문화재 후보) 조통달(57·'수궁가' 중요무형문화재 후보) 안숙선(53·'가야금산조 및 병창' 중요무형문화재) 명창이 펼친 농익은 소리와 연기다. 여기에 김경숙 임향님 최영길 왕기석 왕기철 유수정 등 내로라하는 국립창극단 단원들이 가세하여 창극 신구세대의 어울림을 보여줬다.

박송희 명창은 10대에 안기선 김억순과 같은 대명창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다. 그리고 박록주 명창의 소리를 필생의 학습 목표로 삼아 오늘날 박록주제 '흥보가' 전승의 중심이 됐다. 여성으로서 무겁고 힘찬 소리를 내는 성우향 명창은 여성 국극을 주로 해왔다. 김영자 안숙선 김수연 등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정정렬에서 김연수로 이어지는 동초제 판소리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오정숙은 1972년 명동 국립극장에서 국내 최초로 '춘향가'를 8시간에 걸쳐 완창한 기록을 갖고 있다. 자그마한 체구지만 '오척 거인'이란 찬사를 들을 정도로 소리가 높고 성음이 맑다. 남해성은 김소희 박초월 선생에게 사사했다. 장충동 국립극장 개관 공연 당시 별주부 역의 조상현 명창과 3일 간 연장공연을 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신영희 명창은 한때 코미디 프로그램 '쓰리랑 부부'에 출연하여 일반인에게 친숙한 국악인이다. 18세 때 장월중선에게 판소리를 배웠으며 김소희 명창의 무릎제자다. 조통달 명창은 친 이모인 박초월 명창과 국창으로 추앙받던 임방울선생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으며 내지르듯 고음을 내는 통성이 뛰어나다. 판소리 다섯 마당을 모두 완창한 안숙선 명창은 성음과 연기력이 뒤어난 명창으로 국립창극단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지금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으로 창극을 지도하고 있다.

판소리 다섯 마당의 진수와 일곱 명의 명창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었던 전통창극 '다섯 바탕뎐'은 기념비적 공연으로 우리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문화예술은 현재화를 거듭하며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다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것이다.

산재의료관리원 겨울호> (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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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http://columnist.org/kyoos
시인 ·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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