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12월 7일 No. 556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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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풀 냄새가 싱그러운 늦은 봄날, 중학교 1학년인 심효순과 심미선이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56호 지방도로는 편도 1차선으로 길이 좁아 그들은 갓길을 따라 걸었다. 그 때 양주군 덕도리 방향으로 진행하던 미2사단공병대 소속 가교 운반용 궤도차량이 여중생을 덮쳤다. 그들은 꽃망울을 피워 보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숨졌다. 지난 6월 13일 오전 10시 45분경이었다.

그로부터 5개월여에 걸쳐 국민적 공분(公憤)을 불러일으키며 벌어졌던 '여중생 사망사건' 유·무죄 공방은 미군에 의해 기소된 미군 관제병과 운전병 2명에게 '죄 없음' 평결이 내려진 채 일단 막을 내렸다. '명백한 피해자는 있는데 책임지는 가해자는 없는' 코미디 같은 결론에 경악과 분노로 말문이 막힌다.

주한미군 재판은 미국의 군사재판 규정에 따라 유·무죄를 판단하는 배심원들을 사령관이 지명하는 미군으로 구성되며 판사와 검사, 변호사도 모두 같은 미군이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미군 배심원들은 가해자인 미군에게 동료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죄 평결이 나면 검찰은 항소를 할 수도 없다.

미군으로만 짜여진 배심원들이 무죄를 평결한 것은 재판이 아니라 형식적인 공판으로 한국 국민을 우롱하는 기만극이다. 50t이 넘는 장갑차로 여중생을 2명이나 깔아 죽이고도 죄를 짓지 않았다면, 미국이 진정 우리의 '우방'인지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죄 없음' 평결의 근거는 '통신장애'로 알려졌지만, 문제는 '통신장애'가 확인되지 않은 일방적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고 당일은 날씨가 맑았고, 여중생들은 궤도차량이 오는 것을 보고 길옆으로 비켜 걸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시민사회 단체에서는 '궤도차량을 몰던 미군이 맞은 편에서 오던 미군 차량을 피해 갓길로 차를 몰다가 충돌이 우려되자 장비와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학생들을 보고도 그쪽으로 차량을 몬 살해사건' 이라는 의혹을 강력히 제기해 왔다.

결국 사건 초기 "누구의 과실도 없다"고 논평했던 미군의 오만함이 미군 군사법원의 판결로 정당화된 셈이다. 미군측은 이번 재판이 규정에 따른 것으로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됐다고 주장한다. 설령 그렇더라도 과실치사 혐의마저 무죄로 평결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무죄' 항의 폭력으로 누른 경찰

더욱 분노를 치솟게 하는 것은 '미군 무죄' 항의를 폭력으로 누른 경찰의 과잉진압이다.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가 경기도 동두천시 미 2사단 앞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부대 안으로 붉은 색 페인트가 담긴 병을 던지고,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다. 문정현 신부와 한상렬 목사는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삭발식을 가졌으며, 일부 참가자는 '살인미군 규탄'이라는 문구를 혈서로 썼다.

경찰은 공격용 알루미늄 방패로 시위대를 저지했다. 경찰에 둘러싸여 집단으로 구타당한 시민은 호흡곤란 상태에서 사진기자들에 의해 발견되어 병원에 실려갔다. 병원과 집회 현장 사이를 구급차가 여러 차례나 다녀갔다. 이 과정에서 20대 여성 시위자가 방패에 맞아 이마가 찢어지는 등 몇 명이 다쳤다. 분에 못 이겨 실신한 대학생도 있었다. 미군에 의한 여중생의 억울한 죽음에 우리끼리 싸운 꼴이 됐다. 경찰로서는 2사단으로 진입하려는 시민들을 막는 게 '공무집행'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과잉진압은 그 수준을 훨씬 넘어 폭력적이었다.

미군의 무죄평결과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국민들의 반미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런 사태가 양국 모두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반미 감정 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근본 대책 마련이 절실하며 그 핵심은 불공정한 주한미군주둔협정(SOFA)의 개정이다.

핵심은 불공정한 SOFA 개정

SOFA는 주로 약소국이 자국에서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외국 군대에 제한된 범위의 편익을 보장해주는 조약이다. 주둔지역 국가의 입장에서는 외국군대의 법적 지위를 보장해주는 대신 이들이 저지르는 범죄를 억제하거나 사법처리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한·미 SOFA는 1967년에 체결됐다. 우리 정부가 끈질기게 미국 측에 요구해 미군을 처벌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전에는 살인·강간 등 흉악 범죄를 저지른 미군들을 우리가 처벌할 길이 거의 없었다. 91년 처음 개정된 데 이어 2001년 다시 고쳐지면서 몇몇 독소조항은 사라졌다.

그러나 한국 측 검사는 1심에서 무죄가 난 미군 피의자에 대해 항소할 권한이 없다. 또 한국이 일차적 재판권을 갖고 있는 범죄라 하더라도 미국 측 요청이 있을 때는 특히 중요한 경우를 제외하곤 재판권 행사를 포기하도록 규정돼 있다. 이는 반강제적 성격을 가진 조항으로, 대부분의 미군 범죄에 대해 미국 측의 요청만 있으면 재판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원인이 됐다.

SOFA 규정은 미군 범죄자에 대한 처벌보다는 인권 보호 쪽에 지나친 특혜를 부여한 것이어서 반드시 재개정 돼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의 불균형 해소다.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불공정한 규정으로는 또 다른 '무죄 평결'이 계속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한국 수사기관이 기소 후에는 미군 피의자를 신문하지 못하도록 한 규정과 미국 정부 대표의 입회 없이 행해진 진술의 증거 능력을 배제하는 조항 등이 시급한 개정 대상으로 꼽힌다는 것이 법조계와 학계의 주장이다. 공무 중 발생한 범죄라 하더라도 한국인의 생명과 직결된 경우엔 한국에 초동 수사권을 주는 쪽으로 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 국민의 자존심을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혈맹의 관계가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라도 SOFA는 반드시 개정돼야 한다는 점을 미국은 명심해야 한다.

- <월간 '사진기자' 12월호> (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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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http://columnist.org/kyoos
시인 ·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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