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12월 6일 No. 555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 딴 글 보기 | 손님 칼럼 | 의견함 | 구독신청/해지 | columnist.org |
퇴기와 공맹(孔孟)

퇴기(퇴직기자) 3, 4개월쯤 되던 어느 날 길을 지나다 이미 백수 선배가 된 동료를 만났다. 근황을 묻기에 아직 혼미 상태라고 대답했더니 그는 자신 있게 내 길을 안내했다. 두 말 말고 내일부터 당장 한문서당을 찾아가 사서삼경 등 한문 전적을 공부하라고 권유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현직에서 떠난 뒤에도 미련과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해 질척거리며 과거에 매달리고 주춤거린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떠나야 하거늘 그렇지 않아 직장후배들의 따가운 눈총세례를 받는다.

그 중에서도 기자출신들 즉 퇴기들한테서 그런 증세가 더 많이 나타나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별 것도 아닌 현역시절의 활동을 대단한 일인 것처럼 어디에서나 즐겨 화제에 올려 과장, 과시하고, 이미 떠나온 회사나 언론계 전체에 대해 필요이상의 관심을 나타내는데 옆에서 보기에 딱할 정도다. 술장사 몇 십년에 엉덩이짓만 남은 진짜 퇴기들과 다를 바 없어 민망하기 그지 없다.

서당 가기를 권하는 동료는 이런 것을 예로 들며 그것이야말로 무지와 어리석음의 소치니 그렇지 않으려면 한문 서적을 들여다보며 반성하라고 당부했다. 읽다 보면 무식과 무지몽매로 그동안 독자와 사회에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쳤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문과 기자의 현역 시절 잘못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대강 짐작은 갔다.

그는 이미 서당을 수년간 다닌 뒤 정규과정까지 마치고 이미 평생연구 채비를 차린 터이니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 없었다. 그 길로 서당에 등록을 했다.

그러나 반성이나 깨달음도 어느 정도 기본기가 있어야 가능한 법. 내 실력이란 게 워낙 바닥이다 보니 그럴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대로 시간을 때우고 조금씩 배우는 재미도 생겨 그냥 다니고 있다. 그리고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다 퇴직한 많은 이들을 수업시간에 알게 되고 바로 그들을 통해서 기자와 언론이 저지른 잘못을 다른 각도에서 실감하게 된다. 또 범죄 현장의 증거처럼 하나하나 드러나는 자신의 무지 앞에서 대책없이 부끄러워 하고 있다.

한편 재미있는 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다. 서당을 다닌다고 하면 10명중 8명은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다. 대놓고 말은 않지만 이제 '공자왈 맹자왈' 해서 뭘 하겠느냐는 눈치이다. 물론 나의 생계를 걱정해주는 속깊은 뜻이 많이 담겨 있다. 하지만 1명 정도는 아예 노골적으로 비웃는다. 골프, 헬스클럽 아니면 하다 못해 고스톱을 만날 치러 다닌다 해도 그럭저럭 이해하겠지만 영어 일어도 아닌 한문을 배우러 다닌다는 건 도대체 알 수 없다는 얼굴이다. 다른 직종보다 기자출신들의 반응이 더욱 그렇다.

극소수만이 한문을 배우러 다니면 좋겠다는 긍정적 반응을 보인다. 이 나이에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남의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비슷한 질문에 진력이 나서 또 다른 선배 퇴기에게 고충을 털어놓았더니 대답을 가르쳐 주었다.

"나이 들었다고 지적 호기심마저 없으면 그 사람을 살아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나이가 들어 늙는 것이 아니라 지적 호기심이 사라지는 날 늙기 시작한다" 나의 어정쩡한 행로에 힘을 보태주는 말이었다. 그는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말로 된 이탈리아어 교재로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중이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기에 그 말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 대한언론인회보 12월호 (2002.12)


-----
박연호
http://columnist.org/ynhp

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http://columnist.org

[칼럼니스트]를 이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