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11월 30일 No. 552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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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죄를 네가 알렸다?

삼권분립이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던 조선시대 형사절차(刑事節次)는 규문주의(糾問主義)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판관이 직권으로 피의자를 체포하고, 일방적으로 신문, 또는 고문을 가한 후 판결까지 내렸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사법기관 이라고 할 수 있는 刑曹(형조)가 형법을 관장했고, 대사구(大司寇) 또는 형판(刑判)으로 불렸던 정2품 벼슬의 형조판서가 책임자였다. 형조를 구성하는 부서로는 상복사(詳覆司) 고율사(考律司) 장금사(掌禁司) 장예사(掌隸司) 등 4사(司)가 있어 중죄인의 재심, 범죄자 조사, 구금업무 등을 관장했다.

죄수를 가운데 두고 여러명이 붉은 몽둥이로 오뉴월 개 패듯 태질을 하거나 얼굴이나 팔뚝에 ‘강도’ 등의 문신을 새기는 자자형(刺字刑)을 자행하기도 했다. 역모(逆謀) 등 중죄인의 경우 임금이 직접 국문(鞠問)을 했다.

영화나 TV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피의자 신문의 통상적인 방법은 죄수를 형틀에 묶어 놓고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추궁한다. “억울하옵니다”라는 대답이 나오면 “바른 말 할 때까지 매우 쳐라”고 명령한다. 심한 매질을 피하기 위해 허위자백을 하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오랏줄로 묶는다는 의미의 ‘우라질 놈’이니, 자자형을 가하는 ‘경을 칠 놈’은 약과다. 언어의 폭력도 심했지만 극형에 처하는 방법도 ‘오살’ 또는 ‘육시’ 등으로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근대법 전까지 동서양 대부분의 나라는 고문을 합법적인 유죄판단의 수단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 이후 고문에 의한 자백의 증거능력이 부인되고, ‘무죄추정의 원칙’이 확립됐다. 우리나라의 헌법과 형사소송법도 ‘고문 금지’와 ‘무죄추정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물고문 사건 이후 김대중 정권에서만은 고문이 사라졌을 것이라는 믿음은 살인 혐의 피의자 조 모씨 ‘구타 사망’사건으로 보기 좋게 깨져버렸다.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나라에서 ‘피의자 구타 사망’은 국가적 망신이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이 사퇴하고 담당 주임검사가 구속되는 사상 최악의 사태를 맞았으며 이를 계기로 검찰의 전근대적인 수사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물 고문’ 장소라는 오명을 안고 있는 서울지검 특별조사실이 13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또한 인권 보장을 위해 변호인이 피의자 신문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한 것도 진전된 제도 보완이다. 이밖에도 밤샘 조사와 검사가 아닌 검찰 직원들의 단독 조사도 금지됐다. 그러나 참고인을 강제로 소환하거나 허위로 진술한 것을 처벌하겠다는 방안에 대해서는 법조계?시민단체 등에서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 입법 과정에서 논란이 예상된다.

아무리 조폭이고 살인 혐의자라 해도 수사관의 고문 치사는 어떤 논리로도 변호할 수 없다. 인권은 옹호돼야하고 고문은 사라져야 한다. 적법절차에 따라 과학적 수사를 통해 물적?인적 증거를 수집하는 증거수사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직폭력배와 마약사범은 세를 확장하면서 기업화하고 있다. 특히 임기 말 치안공백이 우려되는 때이다. 가령 온 몸에 문신을 하고 몸집이 집채만한 조폭?마약 피의자를 신문하면서 “인간적으로 말할 때 순순히 자백하시오?”라고 하거나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는 식으로 신문을 한다면 술술 털어놓을 범인이 과연 있을까?.

3년간의 집요한 추적 끝에 사명감으로 살인 용의자를 검거한 주임검사의 구속을 지켜 본 동료검사들이 “조폭 수사는 이제 끝”이라고 탄식한 것은 인권과 폭력의 상충적 요소 중 폭력을 두둔한 발언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인터넷신문에 오른 네티즌들의 반응 역시 9대1 정도로 주임 검사에게 동정적인 것은 강압수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한 의견이지 인권을 무시하려는 발상 또한 아니다. 흉악 범죄인들의 기를 꺽기 위한 “가혹행위는 일종의 필요악”이라는 어느 검찰 수사관의 주장도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잘못된 수사관행은 바로잡아야 하고 조폭의 인권도 보호돼야 마땅하지만, 공권력을 지나치게 위축시키면 범죄가 활개치고 시민의 생활은 불안해질 것이다.

- <담배인삼신문> 200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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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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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rist Meister Schule 기획이사
시인 ·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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