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11월 19일 No. 547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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땜질식 농정 이젠 그만

수확의 기쁨을 누려야 할 가을이지만 농심은 우울하다. 최근 태풍 '루사'가 휩쓸고 간 상처가 극심했던 강릉을 둘러보면서 비참한 실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확은커녕 유실되거나 자갈밭으로 변한 농토를 바라보며 복구작업을 하는 농부의 얼굴엔 먹장구름이 잔뜩 끼었다.

잦은 늦가을 비에 찬바람이 불면서 농심엔 어느새 싸늘한 칼바람이 일고, 컨테이너 박스에서 긴 겨울을 날 일이 아득하다는 것이다. 그나마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워 추수를 한 농가도 미숙벼 투성이에 쭉정이가 많아 시름에 젖기는 마찬가지다.

태풍과 일조량의 부족 등으로 쌀의 질이 떨어지고 등급이 하락하면서 농가 소득에 차질이 예상되는 데도 추곡 수매가는 지난해 수준에 머무르고 있어 이중고를 겪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수해 농민들은 약정수매제에 따라 연초에 받은 추곡수매 선급금 상환문제로 또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수해 농가의 경우 정부와 체결한 현물 인도 약속 이행이 사실상 어려운 상태다.

약정수매는 정부와 생산 농민간의 계약행위이다. 따라서 선급금으로 일정 부분의 수매자금을 미리 받았다면 농민은 설사 수해를 당했다 해도 계약을 지켜야 할 입장이다. 정부는 특별재해지역으로 선포된 수해 농민들에 대한 지원조치에 나섰지만 농토와 함께 집까지 태풍에 휩쓸려간 농가는 선급금을 상환할 뽀족한 방법이 없다.

80% 이상 피해를 본 농가에는 1년간 상환 기간을 유예해 주고, 30∼80% 피해를 본 농가에는 이자를 면제하되 선급금은 그대로 올해 말까지 상환하도록 조치했다. 선급금을 제때에 갚지 못하면 15%라는 고율의 연체료도 물어야 형편이다. 이 정도의 조치가 한 해 농사를 망친 농민들에게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피해 보상 규정 또한 까다롭고 현장 실태조사도 주먹구구식이어서 피해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농가도 많다.

피해 정도가 심한 저소득 영세 농가들에 대해서는 올해 선급금 만큼은 장기 저리로 상환 기간을 연장하여 준다거나 분할 상환을 허용하는 방안 등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대책이 나와야 할 것이다.

오락가락하는 농정에 대한 비판도 끝이 없다. 2년 전만 하더라도 농촌지도소에서 저급 다수확품종을 심으라고 권장하더니 쌀이 남아도니 이제는 품질로 승부를 걸라고 한다. 노는 논 일구면 농약 값에다 종자까지 지원했으나 지금은 휴경보상제니 소득보전직불제를 해주겠다니 소가 웃을 노릇이라며 한목소리를 낸다.

잎담배 재배 농가도 시름에 찬 한숨을 토해내기는 마찬가지다. 올해 잎담배의 품질은 지난해보다 향상됐으나 태풍 등 자연재해로 생산량이 크게 떨어졌다. 이 때문에 많은 잎담배 생산 농민들이 생산량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잎담배 수매 가격은 지난해와 같이 동결된 데다 등급 사정이 낮아 최소 생산비마저 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개방 압력은 농민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대만의 쌀시장 개방 결정으로 농업의 파탄을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다. 그런 가운데 한국-칠레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도 농심을 자극하고 있다. "시설포도 등 일부 과일류의 소규모 피해가 우려되지만 농업 전반적으로 볼 때 큰 피해는 없을 것"이라는 농정 당국의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농민단체들은 "농업을 내주고 다른 산업에서 이익을 찾아보려는 전형적인 반농업정책의 결과"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역대 정부가 농민들의 딱한 사정을 도외시한 정책을 폈겠는가마는 체계적이고도 장기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고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해 왔다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농업을 산업정책적 측면에서 접근하지 못하고,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농업구조를 갖추기보다는 농가빛 탕감 등 땜질용 시책에만 급급했던 것이 농정실패의 원인이다. 현재 농민이 지고 있는 부채의 상당부분이 정책자금이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의원입법으로 추진하고 있는 '농어업인의 부채 경감 특별법 개정안'도 현실적으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근본적 해결이 될 수 없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부채 경감이라는 땜질보다는 농민들이 빚지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장기적 안목의 정책수립이 절실하다.

흙만을 믿고 비지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농부들이지만 빚더미에 허덕이는 농촌의 아픈 현실은 농민을 위한 '농민의 날(11일)'을 무색하게 한다.

- <담배인삼신문 11월15일자> (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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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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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rist Meister Schule 기획이사
시인 ·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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