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11월 1일 No. 537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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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의 유토피아 '보길도'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 1587∼1671)는 국문학의 폭과 깊이를 심화시킨 조선시대의 시인이다. 고산은 자연을 그리되 허구적인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보길도와 금쇄동의 자연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생활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한 평생을 유배와 은둔과 소외의 아픔속에서 '오우가' '어부사시사' '산중신곡' 등 영롱한 시가(詩歌)문학을 꽃피웠다. 한시와 한글시조를 망라한 그의 단가문학에는 유배지에서 겪었던 알싸한 슬픔이 묻어난다.

강촌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 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넓고 맑은 물에 실컷 즐겨 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간세상 돌아보니 멀도록 더욱 좋다
         <어부사시사 추사(秋詞) 제2수>

살찐 고기를 낚아 올리는 어부의 가을 노래를 떠올리며 옛 시인의 유토피아 '보길도'를 향한다. 전라남도 해남 땅끝마을 갈두항. 더 갈곳이 없는 땅끝에서 옛 시인이 머물던 섬을 향해 떠난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고산 또한 절망의 끝에서 새 살이 돋는 희망을 자연에 담아 노래했다. 점점이 떠있는 섬들 사이로 여객선이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달린다. '앞 뫼는 지나가고 뒷 뫼는 나아온다'.

동풍이 건 듯 부니 물결이 고이 인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동호를 바라보며 서호를 가자스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앞 뫼는 지나가고 뒷 뫼는 나아온다.
         <어부사시사 춘사(春詞) 제3수>

고산의 삶은 짧은 벼슬과 긴 유배의 연속이었다. 당쟁이 심화되는 불안정한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쪽같은 성품으로 일관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모략과 중상뿐이었다. 서른 살에 시작된 귀양살이는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이어졌다. 유배지에서 보낸 세월이 무려 17년이나 된다..

'어부의 가을노래' 찾아 보길도로

서울 연화방(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난 고산은 시와 노래와 직언(直言)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임금께 올린 상소만 30편이다. 대부분 나라와 시대의 앞날을 걱정하며 올바른 정책과 시정을 요구한 내용이거나, 자신에게 내려진 벼슬을 사양하거나 나이를 핑계로 벼슬을 그만 두겠다는 뜻을 담은 글이다.

고산이 30세가 되던 해(광해군 8년·1616년) 그 유명한 '병진소(丙辰疎)'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했다. 임금이 행사할 권리를 제멋대로 부리는 이이첨과 그 일당의 전횡을 고발한 내용이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이듬해 1월9일 첫 번째 귀양길에 올랐다. 서울에서 2,144리 떨어진 최북단 함경도다. 변방으로 귀양간 선비들이 또 어떤 모의를 하게될지 두려운 조정은 약 2년 뒤 경상도 기장 땅으로 유배지를 옮기도록 했다. '인조반정(1623년)'으로 풀려날 때까지 6년 4개월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그 때 고산의 나이 37세. 유배에서 풀려난 뒤 의금부도사 안기찰방 등을 지냈으나 벼슬은 관심밖이었다. 그는 해남 윤씨가 누대를 살아 온 해남 연동으로 갔다. 귀향을 계기로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향토시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고산의 두 번 째 유배의 죄목은 병자호란(1636년) 때 '임금께 서둘러 달려가 문안을 드리지않은 죄'다. 52세 때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됐다가 그 이듬해 유배생활에서 풀려 해남으로 돌아갔다. 유배기간은 짧았지만 햇수로는 2년이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부터 은둔의 길로 접어들었다. 보길도의 부용동과 해남의 금쇄동을 쓸쓸히 오가며 창작에 몰두했다. 이 무렵 '오우가' '산중신곡' 등을 지었다. 고산문학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고산의 세 번째 유배는 백발이 성성한 74세 때다. 효종이 죽자 조대비에 대한 상례(喪禮)에 이론이 생겼다. 고산이 3년 상(喪)을 주장하는 '논례소(論禮疎·헌종1년)'를 올리자 서인파가 들고일어났다. 7년이 넘는 긴 유배생활 끝에 81세 되던 해에 풀려났다. 세 번째 유배에서 풀려난 고산은 보길도 낙서재에 칩거했다. 고산의 은둔지 보길도는 땅끝마을 갈두항에서 뱃길로 1시간, 고산의 유배사(流配史)를 더듬는 동안 여객선은 보길도 청별선착장에 닻을 내렸다.

관광 붐을 탄 보길도는 이제 옛 시인의 한적한 은둔지가 아니다. 갤로퍼 택시가 시동을 걸고 승객을 기다리고 마을 어귀엔 음식점, 주점 등의 간판이 어지럽다. 보길도는 동서 길이 12㎞, 남북 8㎞. 1천여가구에 3,300여명이 살고 있는 작은 섬이다.

'대쪽 선비'의 짧은 벼슬 긴 유배

고산은 왜 외딴 보길도로 흘러 들어왔을까. 고산이 보길도에 든 것은 그의 나이 51세 때. 병자호란(1936년)이 일어나자 고산은 해남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강화도로 피난한 왕자와 빈궁을 구하기 위해서다. 그가 강화도에 도착했을 땐 강화도가 청나라 군사에게 함락되고, 임금(인조)이 항복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그 치욕을 감당할 수 없어 다시는 내륙을 밟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제주도로 뱃머리를 돌렸으나, 풍랑을 만나 머문 곳이 보길도의 황원포. 그는 보길도의 빼어난 풍광에 매료되어 제주도행을 단념하고 그곳에 정착하게 됐다.

고산이 보길도에 정착한 것은 단지 산수가 빼어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병자호란후 대동찰방과 사도시정이라는 벼슬이 내려졌으나 그는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았다. 그것이 또 비난의 화살이 되어 되돌아왔고, 자신의 죄를 변론한 '공초'에는 보길도에 들어간 속내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바다 가운데 해도로 들어간 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강도(姜都)의 배를 만나지 못하여 바로 이 곳에 들어온 것이니, 이 또한 병란으로 마음의 병이 발광한 것이며, 실로 애국하고 우국한 데서 나온 일이오니, 어찌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해 줄 바가 아니겠습니까.(…) 평생에 성정은 산수를 좋아함에 있었는데, 거처하던 섬은 석천(石泉)이 빼어나 흥을 붙여 근심을 잊었습니다.(…) 언덕을 지나며 골짜기를 찾아 쉬고 다니다가 먼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모두 가슴속의 답답한 회포를 풀어보려는 뜻 아니겠습니까.

보길도는 섬 전체가 고산의 유물관이다. 섬 중앙에 있는 부용동(芙蓉洞)은 격자봉 광대봉 망월봉에 둘러 싸여 마치 연꽃 속에 둥지를 틀고 있는 형상이다. 부용동은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1.5㎞. 고산은 생활공간인 낙서재(樂書齋)를 짓고 마을 이름을 부용동이라 하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연(蓮)과 인연이 깊었다. 태어난 곳도 서울의 연화방(蓮花坊)이고 해남 향리의 이름 역시 연동(蓮洞)이다. 부용동은 신선들이 놀았다는 중국의 부용동을 염두에 둔 착상인 듯 싶다. 고산이 살았던 낙서재의 흔적은 간 곳 없고 초석과 기와조각만 옛 흔적을 알려 줄 뿐이다. 이 곳에서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의 후렴구로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지었다.

그는 부용마을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안산(案山) 중턱에 동천석실(洞天石室)을 짓고 글을 읽고 차를 마시며 '가슴속에 답답한 회포'를 풀었다. 동천석실 아래에 있는 너럭바위를 조화있게 이용하여 조성한 석담(石潭) 석정(石井) 석천(石泉) 세 개의 연못에는 노랑 어리연꽃이 앙증맞게 피어 있다.

'까르르 까르르' 해맑게 웃는 '갯돌'

보길도 골짜기 바깥자락에 지은 세연정(洗然亭)은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룬 정원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고산은 야외 무대격인 동대와 서대를 세우고 무희로 하여금 비홍교를 오가며 춤을 추게 했다. 연못 가운데 작은 배를 띄우고 아이들에게 채색옷을 입혀 '어부사시사' 등의 가사를 느린 가락에 맞추어 노래부르게 했다. 은둔자의 정신적 사치가 심한 것이 아니냐는 비난과 오해가 당시에도 있었지만 그는 노래(歌)와 춤(舞)과 시(詩)를 함께 아우르면서 '비로소 이 섬에 와서 흥을 붙이고 근심을 잊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밖에도 노 시인의 발길이 머문 곳마다 옥소대, 곡수당, 월하탄, 귀암, 하한대 등의 이름을 붙인 명소들이 수두룩하다. 고산은 보길도에 7차례를 들고나면서 12년을 보냈다. 81세 때 세 번째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부용동 낙서재에 칩거하다가 85세 되던 1671년 눈을 감았다. 3개월후 생전에 자신이 터를 정한 해남군 현산면 금쇄동으로 옮겨져 안장됐다.

고산 유선도의 유적과 함께 관광객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상록수림으로 둘러싸인 예송리 해수욕장의 '갯돌'이다. 검고 윤기 나는 작은 돌들은 파도가 일렁일 때마다 '까르르 까르르' 해맑은 웃음소리를 낸다. 갯돌은 바다를 연주하는 악기와도 같다. 보길도 사람들은 갯돌을 '깻돌'이라고 부른다. 섬 밖으로 반출이 금지된 갯돌은 1999년 6월 '풀꽃 세상을 위한 모임'이 제정한 '풀꽃 상'을 받기도 했다. 갯돌에게 상을 주게 된 까닿은 '우리에게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준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이라고 한다.

- 산재의료관리원 (2002.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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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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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rist Meister Schule 기획이사
시인 ·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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