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10월 26일 No. 534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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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까지 도청이 된다면

한나라당 정형근의원이 국정원에서 도청한 것이라며 한달 사이에 3∼4건의 자료를 잇달아 폭로하자 정치권을 비롯해 정부기관, 기업, 일반시민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가 도청문제로 떠들석하다. 국정원은 도청사실을 부인하지만 정의원은 틀림없는 것이라고 못을 박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도청대상이 고위공직자는 물론이고 청와대와 기업인 등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이라는 점에서 매우 충격적이다.

이처럼 관련기관이 대상을 가리지 않고 도청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짙어지면서 국민들 사이에 도청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은 통화내용을 도청 당하지 않기 위해 휴대폰을 몇개씩 갖고 다니거나 수시로 바꾸는 일이 예사로워졌으며, 제3자 명의의 휴대전화를 사용하기도 한다. 직장인들도 회사용과 개인용을 따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수사기관인 검찰이나 경찰의 간부들은 도청을 우려해 가급적이면 자신의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민감한 사안일 경우 사무실 전화를 쓰는 것을 삼가고 있다. 사적인 대화는 친구 등 타인의 전화를 빌려쓰기도 한다. 어떤 장관은 외출할 때 공중전화를 쓰기도 한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며칠전 한나라당 이회창대통령후보도 도청을 차단할 수 있는 비화기(秘話機)가 달린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다고 밝혀 관심을 끌었다. 지난 18일 과학기술단체 초청 토론회에서 "그 동안 도·감청에 대한 우려 때문에 휴대전화를 서너개씩 들고 다녔지만 엊그제 비화기가 장착된 휴대전화를 입수함으로써 이제 걱정 없이 통화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 것이다.

도청을 방지하기 위해 휴대폰을 여러개씩 갖고 다니는 대표적인 정치인은 「국정원도청자료」를 폭로한 정형근의원이다. 정의원은 휴대폰을 6∼7개 갖고 있으며 전화번호를 수시로 바꾸고 있다. 정의원의 비서진까지도 수시로 휴대폰 전화번호를 바꾸고 있다. 이밖에 많은 한나라당 의원은 물론 민주당 의원들도 휴대폰을 여러 개 갖고 다니며 도청에 대비하고 있다.

비밀업무가 필요한 고위관계자일수록 비공개로 사용하는 휴대전화의 숫자 가 늘어난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10여개의 휴대전화를 갖고 각각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공개 휴대전화, 특히 발신용 휴대전화의 경우 가족이나 친·인척, 또는 보좌진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의 명의를 사용하는 것이 보편화돼있다.

도·감청에 대한 공포증은 이미 심각한 상태에 접어들었음은 여론조사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여론 리서치 전문기관 엠비존과 조선일보가 지난해 11월 전국 20세 이상 남녀 505명을 대상으로 벌인 도·감청 공포에 대한 전화 여론조사 결과는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전화나 휴대전화 등의 도·감청으로 사생활이 노출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낀다"고 응답한 사람이 전체 조사대상자의 73.7%에 이르고 있다. 이는 10명 가운데 7명이 넘는다는 얘기로 99년 9월 현대리서치의 같은 조사에서 나온 응답 38.0%보다 두 배 가까이 된다. 지금 당장 조사를 한다면 아마도 훨씬 많은 수치가 나올 것이다.

유선전화는 그렇다 치고 휴대전화는 과연 도청이 가능한 것인가. 이에 대해 메이커측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지난 2일 국회 정무위의 공정거래위원회 국정감사에서 「011 도청」문제가 논란이 됐는데 SK텔레콤측에서는 "발신지나 통화시간 등은 파악할 수 있지만 통화내용은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한나라당의 김기배 사무총장도 얼마전 "휴대전화를 만드는 회사측의 고위간부가 휴대전화도 100% 도청된다고 귀띔해줘서 그때부터 수시로 휴대전화를 교체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총장의 말처럼 정치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휴대전화가 도청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정치권에서는 “휴대전화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정설로 돼있다.

국내 전문가들은 디지털 감청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정보통신대학원 의 모 교수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도 의지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고 밝힌 적이 있고 국내최대 이동통신회사의 한 고위간부도 “기술적으로 안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오돈성 박사는 “서울의 경우 도청 대상과 최소한 5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등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감청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어쨌든 정보통신 기술의 급속한 발달과 더불어 이젠 휴대전화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도청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오래된 속담이 요즘 같은 고도정보화사회에서 더욱 실감나게 들리는 건 아주 슬픈 일이다.

- 2002.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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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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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월간 인터넷라이프 편집인.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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