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10월 8일 No. 522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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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우리말

10년 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올림픽에서는 공식 언어인 영어, 불어와 주최국 스페인어 외에 일부 지방어인 카탈로니아어가 사용되었고, 깃발도 올림픽기와 카탈로니아기가 공식 게양되었다. 주최국 국기인 스페인기도 올라갔지만 뒷전이었다. 이는 공식 언어와 주최국 언어만 사용해야 하는 규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게양하는 기도 마찬가지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고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무엇 때문에 그걸 인정했는가.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스페인 동북부 지방 카탈로니아는 15세기에 마드리드 지역의 아라곤·카스티야 왕국에 합병 당한 뒤 오늘에 이르렀다. 그 뒤 수백 년 동안 끊임없이 자치·독립을 위해 투쟁해왔으며 1970년대 프랑코 정권이 무너지자 비로소 언어와 자치권을 되찾았다.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바르셀로나의 이런 특성을 감안해 예외를 인정한 것이다.

카탈로니아는 스페인과 다름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해 그 고유언어를 전 세계인들에게 내세워 과시한 것이다. 언어는 한 민족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며 민족정신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틀이다. 그것이 없어지면 지구상에서 그 민족은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가장 서두른 것도 우리말과 글의 사용금지였다.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면 언어부터 없애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느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점령했을 때 가장 힘쓰는 것이 그 나라 언어 파괴다.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를 합병하면서 게일어와 웨일즈어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프랑스가 베트남에 쳐들어가 언어파괴에 주력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유네스코의 지난 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6천여 개 언어 중 3천여 개가 타민족에 대한 억압정책과 강대국 언어의 문화 경제적 힘에 의해 파괴되어 가고 있다.

한국어 역시 하루가 다르게 무너지고 있다. 그러나 남이 우리말과 글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파괴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중고교생, 대학생, 어른 구분 없이 영어, 일본어 등 외국어, 저질언어 등을 분별 없이 쓰고 가장 순수해야 할 초등학생들까지 이에 뒤질세라 아우성이다.

어린이 신문에 올려진 초등학생들의 글을 보면 이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인터넷 통신용어 이른바 '외계어'로 온통 뒤덮여 있다. 우리말과 글을 쓰는데 비교적 엄격한 신문에 올린 글이 이 정도니 다른 사사로운 데 것들은 오죽하겠는가.

맞춤법을 무시하여 소리나는 대로 적는 것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기호나 부호, 숫자와 자음 모음을 섞어 쓰고 그것도 모자라 야비한 말이나 욕설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띄어쓰기, 맞춤법을 지키지 않고 지나치게 줄인 말을 쓰는 것은 휴대전화나 인터넷에서 시간과 요금을 절약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한 점도 있기는 하다.

또 심리적으로 자기들만이 사용한다는 또래의식이 강하게 작용하는 점도 있다. 이런 것들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 어느 집단에서나 자신들만이 쓰는 은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때의 유행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말과 글을 통해 생각과 판단의 능력이 싹트고 커 갈 나이에 이런 언어에 익숙해지면 세 살 버릇이 여든 살까지 가듯 나중에 고치기 어렵게 된다. 초등학생 등 청소년들이 국어 아닌 이상한 언어를 그냥 재미로 쓰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굳어지면 자신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데 된다..

"겜친구 구해여 (게임 친구 구해요) 환영이에염(환영이에요) ... 로 보네주세여(보내주세요)" "안뇽하세요??(안녕하세요) 기뿐(기쁜) 소식 알료줄깡????(알려줄까)" "제가보기론...맞는것같기도해여....그럼열심히겅브(공부)하셈또" "1루(하루), 2틀(이틀), 3흘(사흘)…… 아, 어서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합창 솜씨를 뽐낼 수 있는 그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겟씀니다.(좋겠습니다) 우리 반은 모두 사십두 명(42명 또는 사십이 명)인데..."

이상은 초등학생들이 쓴 것 중에서도 비교적 알아보기 쉬운 것들이다. 더 심한 것들은 읽기 힘들고 말하기도 민망하다. 이것을 학교 과제물이나 시험 답안지에 바로 쓰지는 않겠지만 자주 대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사용할 수도 있다.

대입수험생들의 논술을 지도하다 보면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적절한 낱말의 선택, 문장의 짜임새, 글을 이끌어 가는 생각의 힘, 내용 등에서 미진한 점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 관계 사람들과 함께 궁리한 끝에 우리는 고교생들의 말과 글 버릇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려면 초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낱말에 대한 이해와 감각, 문장 작성법, 글 전체의 얼개, 거기에 담아야 할 내용은 어렸을 때의 정확한 국어교육과 독서지도를 통해서 기본 틀을 갖추는데 우리 교육은 그걸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은 그렇게 중요하다. 그런 때 이처럼 국어 아닌 국어를 쓰며 한글을 파괴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외계어'는 컴퓨터의 영향이라 쳐도 외국어, 외래어, 부정확한 우리말 사용 등은 어린이들보다도 어른들 특히 신문 방송 잡지 등의 책임이 크다. 우리말로도 얼마든지 되는 것들을 외국어로 쓰기 좋아하고 그것이 멋있는 줄 아는 병이 들어도 너무 깊숙이 들어있다.

그런 점에서 초등학교 학생을 비롯한 청소년들의 한글파괴는 근본적으로 어른들의 잘못이다. '심플하다' '해피하다' '매너가 있다'는 등의 말을 예사로 쓰고, 영화제목 광고문안 각종 제품의 명칭에 외국어 투성이며 그것도 모자라 로마자 그대로 표기해야 그럴 듯해 보이는 풍토에서 어찌 청소년들만 제대로 쓰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이 입는 옷과 날마다 쓰는 학용품에 한글이 몇 자나 들었는지 살펴 보라. 우리나라 저력을 세계에 과시했다고 자랑이 대단한 지난 번 월드컵대회 모두들 입었던 붉은 옷에도 영어는 있지만 한글은 없었다.

일제시대처럼 남이 없애려 할 때도 지켜냈던 우리말을 이제 우리가 천대하고 있다. 노예가 되어도 자기 국어를 간직하고 있으면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데 우리는 열쇠를 스스로 버리지 못해 안달이다. 그런 나라나 사람을 어느 누가 좋게 봐 주겠는가.

유네스코는 "하나의 언어가 사라지면 우리는 인간의 사고와 세계관에 대해 인식하고 이해하는 도구를 영원히 잃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각 언어 보호에 적극 힘쓰라고 권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반대로 가며 어린이들까지 물들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노릇이다.

- (주)대교 사외보 '프로의 눈' 9.10월호 (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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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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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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