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10월 6일 No. 520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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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간판 작고 예쁘게

간판은 거리의 얼굴이다. 간판의 크기와 홍보효과가 정비례하는 것은 아닐 진데 우리나라 거리의 간판은 크고 조잡하여 도시 미관을 크게 해치고 있다. 건물을 뒤덮을 정도로 덕지덕지 붙어 있는 간판은 건물에 간판이 붙어있는 게 아니고 간판 속에 건물이 들어가 있는 형국이다.

벽면을 가리는 커다란 간판에 돌출 간판까지 달고 그것도 모자라 깃발형 광고물이나 바람개비형 간판을 거리에 내놓는 업소가 수두룩하다. 도심일수록 더욱 심각해 걷기도 불편하려니와 간판을 쳐다보면 현기증이 일 정도로 어지럽다. 난립한 간판은 공해수준이다. 월드컵 4강을 이룬 국내 도시지만 간판으로 보면 삼류도시다.

더구나 눈에 잘 띄는 붉은 색 간판은 빨간 루주를 진하게 덧칠한 입술처럼 천박해 보인다. 도시미관을 해치는 것은 물론 운전자의 시야를 방해한다. 1999년말 지자체들은 간판 바탕색에 원색인 적색과 흑색은 50% 이내로 해야한다는 규제안을 내 놓았으나 아직도 거리엔 빨간 간판 일색이다. 해당 업체들은 통일된 이미지 마케팅을 할 수 없고 간판 교체비용 등을 들어 반발하여 교체에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옥외광고물관리법은 교차로와 인접한 도로의 경우 한 업소에서 4개까지 간판을 걸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보통 업소는 3개까지 달 수 있다. 5층 건물에 20개의 업소가 입주했을 경우 60∼80개까지 간판을 달 수 있다니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실제로 6개 업소가 입주한 서울의 어느 5층 건물 벽엔 간판이 27개나 붙어 있다.

이토록 간판이 난립하는 데는 법 규정이 느슨한 것이 가장 큰 문제다. 허술하고 물렁한 규제마저 대다수 업소들이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 지난해 전국에서 3천만개 이상의 불법 간판이 적발된 데 이어 올 들어 6월까지 2천만개 가까이 단속될 정도로 불법간판은 늘어나는 추세다. 당국도 인력 부족과 상인들의 반발로 단속을 강력하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거리간판도 문화다. 서울 인사동엔 전통문화의 거리답게 작고 예쁘고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의 간판들이 늘어 운치가 있다. 고목·한지·옷감 등 자연 소재로 만든 곳도 많아 고풍스러운 지역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서울의 강남구 청담동·압구정동·홍대앞 거리·대학로 에는 유리·스텐인리스·청동 등을 소재로 한 간판에 요란스럽지 않게 한 두 글자로 상호를 새긴 '패션간판'이 늘어 세련미가 돋보인다. 조금만 신경 쓰면 얼마든지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느껴져 눈길을 끌 수 있다.

선진국의 거리가 운치 있게 느껴지는 것은 멋진 간판 덕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선 대부분의 점포가 평평한 판에 글자를 새긴 입체형 간판을 단다. 글자를 새기지 않고 덧붙이는 판형(版型) 간판을 달려면 크기와 높이에 제한을 받는다. 색상도 흰색·회색 같은 무채색으로 제한된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는 빨간색 바탕에 황금색 등의 총천연색 간판을 볼 수 없다. 문화재가 많은 시내 경관을 고려해 파리시가 옥외광고물의 색상을 흑백으로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광고물 관리 정책은 주변 건물 및 거리 경관과의 조화가 최우선이다. 때문에 지역별로 광고 완화, 광고 제한, 광고 금지 등 7가지로 세분해 간판 수와 크기 등에 차등을 둬 관리한다. 심지어 간판을 뗀 자리에는 본드 흔적조차 남지 않도록 사후처리에 대한 책임까지 명문화하고 있다.

광고물에 대해 가장 엄격한 규제를 가하는 나라는 독일로 유럽 국가 중에서 간판 크기가 가장 작다. 정부는 주변 경관과의 조화를 위해 간판이 없는 것이 최선이라는 정책을 고집한다. 가까운 일본도 건축물의 준공 허가 때 건축·광고물 담당창구에서 사전에 간판 숫자 등을 정해주는 경우가 많다.

미국 보스턴 시의 경우 간판은 주거·비주거 지역에 따라 크기가 규제되며 성인 유흥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 네온사인 또는 동영상 광고물을 내걸지 못한다. 심지어 반사가 심한 재료나 형광물질을 간판에 쓸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다. 선진국에선 이처럼 간판을 도시 경관을 구성하는 공공재로 보고 엄격하게 관리한다.

이제는 간판도 문화 콘텐츠로 발전 시켜야 간판의 난립을 막고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 수 있다. 간판이 도시 미관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간판은 공공시설물로 인식하여 경제적 측면 보다 공공의 사회질서라는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는 전문가의 지적을 이제는 귀담아 듣고 실천에 옮길 때다. 간판은 환경과 공공문제의 연상선상에서 관리돼야 한다.

프랑스나 독일처럼 규제가 엄격하지는 못할망정 가장 시급한 것은 느슨한 규제의 강화다. 간판의 크기를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내리고 업소 당 3∼4개까지 부착할 수 있는 간판의 숫자를 줄여야 한다. 건축물 준공 허가 때 건축·광고물 담당 창구에서 사전에 간판 크기와 숫자, 간판 색상까지 정해주는 방안이 바람직하다. 선진국들은 간판의 크기와 허용 개수 면에서 우리의 절반 수준이다.

현재 허가제로 돼 있는 간판업자영업도 자격 기준을 정해 허가제로 바꿔야 할 것이다. 서울의 경우 영세간판업체가 4,000여 곳 난립해 있으니 미관보다는 수입을 위해 크기와 숫자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최근 둘러본 싱가포르에서는 광고 전문회사 4곳이 디자인을 맡고 하청업체들이 간판을 제작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전문가들로 구성된 광고전문회사 설립이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한국광고사업협회가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옥외광고사 자격검정 제도를 법제화 할 필요성이 있다. 미적 감각을 살린 작고 예쁜 간판으로 바꿔 단 거리를 상상만해도 상큼하다.

- <저널 뉴코리아> 10월호 (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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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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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rist Meister Schule 기획이사
시인 ·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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