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9월 3일 No. 504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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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건망증

소크라테스는 기록을 상당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사람이 쓰기에 주력하면 기억력 쇠퇴가 불가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내적 수단인 기억 대신 외적 수단인 문자 의존도가 높아지면 정신의 해방감이 지나쳐 두뇌 활동이 둔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기록과 수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한 인류의 지식확대와 문화발전 앞에서 그의 불만은 별다른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두뇌기능과 기억용량을 확장하여 인간의 경험과 지식을 축적, 발전시켜 온 문자와 책의 공로에 비하면 그 정도 기억 쇠퇴는 사소한 부작용에 지나지 않았던 까닭이다.

나아가 "총명이 둔필만 못하다"는 우리 속담 같은 것은 소크라테스와는 정반대로 기록의 손을 들어주었다. 즉 시원찮은 기록이 똑똑한 기억보다 나으니 무슨 일이든지 머리를 믿지 말고 반드시 적어두라는 당부다. 사실상 문자가 생긴 이후 일반적으로 기록이 기억보다 훨씬 더 신뢰를 받아 이 둘의 승부는 이미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최근 소크라테스의 지적이 결코 기우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세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인간 두뇌 기능을 무한대로 확장했다는 찬사를 한 몸에 받은 컴퓨터, 휴대전화 등 디지털 기기 이용이 보편화되면서 늙은이도 아닌 젊은이들이 단순한 계산을 못하는 것은 물론 자기 집 전화번호, 내려야 할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 역, 가까운 사람의 이름 같은 것까지도 깜빡하는 일이 급증하기 때문이다.

건망증, 치매는 나이 든 사람들의 질환인데 30대, 20대는 말할 것도 없고 기억력이 가장 왕성해야 할 10대까지도 그런 증상을 보이니 보통 문제가 아니다. 쓰고 셈해야 할 것들을 디지털기기가 다 해주니 할 일이 없어진 두뇌가 '에라 나도 모르겠다'며 나자빠져 버린 것이다. 도둑은커녕 낯선 사람도 오지 않는 한적한 마을의 개들이 짓는 본능을 잊어버리듯이.

이를 일본에서는 나이 든 이들의 건망증이나 치매와 구분, 'IT 건망증' 'IT 멍청이'라 하며 우리나라에서도 '디지털 치매' 또는 '디지털 건망증'이라 일컫는다. 기억력이 쇠퇴할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우려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이제는 인간이 디지털기기에 완전히 종속될지 모르는 걱정스러운 상황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두뇌는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도록 해주는 각 기능의 사령탑이다. 사고 기억 등은 그 가운데서도 우선하는 것들이다. 그런 기능들이 디지털에 밀려 쇠퇴하고 머리가 고작 모자 쓰기, 축구 헤딩에나 필요한 도구로 전락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신체부위를 몸뚱이 위에 붙이고 다니는 존재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나친 걱정이라고 할지 모른다. 필자 역시 속으로는 기우에 지나지 않기를 바란다.


- 웹진 '인재제일' 9,10월호 (2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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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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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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