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8월 19일 No. 494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 딴 글 보기 | 손님 칼럼 | 의견함 | 구독신청/해지 | columnist.org |
국어종합병원

얼마 전 태국에 '국어종합병원'이 생겼다. 외국어 범람, 엉망인 맞춤법, 음의 가락 변질 등으로 크게 망가진 태국어를 보호하기 위해 공익법인인 태국문화센터가 이 병원을 전국에 개설했다. 국어 실력에 문제가 있다 싶은 사람이 방문하면 맞춤법, 성조 등을 진단한 뒤 한 달간 집중적으로 치료해주는 것이다. 국어 훼손이 태국보다 심하면 심했지 결코 나을 것 없는 우리로서는 큰 관심을 갖기에 충분한 일이다.

어느 잡지사 사장 말에 따르면 외국어, 특히 영어의 범람은 하루가 다르다고 한다. 홍수로 급격히 불어 오르는 한강 수위를 가슴 졸이며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추세, 경향이라고 쓰던 것을 이제는 '트렌드'라 해야 하고, 응원단이면 되던 것을 '서포터즈'라고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풍조 때문이다. 그것도 로마자 그대로 표기해야 세련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쓰지 않으면 시대에 뒤졌다고 독자들이 외면하니 미치겠다는 하소연이다.

맞춤법, 띄어쓰기 등에 이르면 사태는 더욱 심각하다. 지난 봄 문화관광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인의 국어 실력이 100점 만점에 29.8점에 불과하며 전체 평균 점수가 6년 전보다 40% 이상 떨어졌다. 한국에 '한국어는 없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서울대학생들의 국어와 한자 실력도 형편없어 교수들이 강의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불평할 지경이니 한심한 노릇이다. 또 거리에 나가 보면 음의 고저 장단이 제멋대로 뒤바뀐 한국어 아닌 한국어를 귀가 아프도록 듣는다. 오죽하면 북한이 한국을 언어의 쓰레기장이라고 비난하겠는가.

따라서 우리도 국어종합병원을 빨리 세워야 한다. 그런 성격을 가진 기관이나 인터넷 사이트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개 단편적이라서 누구나 이용하기 쉽고 편리한 종합병원을 인터넷상에 만드는 것이 보다 나을 것 같다. 일반병실보다는 중환자실과 국어에 관해 뭐든 물으면 즉각 답을 알 수 있는 응급실을 더 많이 마련해야 할 것이다.

외국어나 한자를 철저히 막아 한글로만 표기하고 말하자는 국수주의적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티끌이건 실개천이건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야 높은 산과 넓은 바다가 되듯이 다른 글과 말을 폭넓게 수용해 우리 언어를 풍부하게 만들어야 한다. 단 그런 것들을 잘 소화해서 우리 것으로 만들고 정확하게 사용해야지 거기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은 좋지 않다.

고교생들의 논술시험지나 대학생들의 입사시험 논술 채점 등을 하다 보면 전반적인 국어 구사능력, 사고력, 논리 전개, 서술능력의 답답한 수준에 한숨지을 때가 많다. 국어의 위기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서울대의 논술시험 부활은 그런 점에서 기대가 크다. 중태에 빠진 국어 치료에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웹진 '인재제일' 7,8월호 (2002. 08)


-----
박연호
http://columnist.org/ynhp

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http://columnist.org

[칼럼니스트]를 이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