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7월 20일 No. 475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 딴 글 보기 | 손님 칼럼 | 의견함 | 구독신청/해지 | columnist.org |
월드컵을 국운 상승의 기회로 삼자

한.일월드컵축구대회 개막에 앞서 관계자와 축구전문가들이 은근히 걱정한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우려는 공동개최국인 일본과 매사가 비교되는 점이었다. 세계적 인지도가 최상급인 일본에 비해 한국은 그 위치조차 잘 모르는 외국인들이 많은데다 혹시 알더라도 전쟁, 부정부패, 과격 시위 등 부정적 이미지나 떠올리는 실정이니 애써 잔치를 벌이고도 자칫하면 칭찬은커녕 본전도 건지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전혀 엉뚱하지만은 않았다. 친절, 교통, 질서, 청결, 환경 등을 일본과 비교하면 어느 것 하나 장담할 수 없으니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

둘째 우리가 16강을 갈망하고 있을 때 일본은 사실상 8강까지 내다본다는 국내외 전문가들의 진단이 암암리에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내용과 처방을 내놓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국민과 언론 모두가 잔뜩 기대에 부픈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마당에 만약 우리는 16강에도 못 들고 일본은 8강까지 가면 팬들의 허탈감과 분노가 어떻게 표출될 것인가. 이것이 악화돼 월드컵 잔치를 그르치는 사태로 나아간다면 어찌 할 것인가. 그렇게 되면 월드컵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알리고 정보기술(IT) 강국의 면모를 과시하려던 의도는 산산조각이 나고, 그 동안 쌓아온 나름의 이미지마저 무너지는 판국이니 여간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을 앞에 둔 것 같았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의 한국축구팀과 '붉은 악마' 그리고 우리 국민의 총체적 에너지가 이런 걱정을 한방에 날려보냈다. 아니 당초 목표를 훨씬 초과하여 세계는 물론 우리 스스로도 그 저력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이를 한번의 바람으로 흘려 보낼 것이 아니라 국운상승을 위한 지속적 시스템으로 정착시키자고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당연한 반응이자 마땅한 움직임이다. 이런 기회가 앞으로 언제 다시 올 것인가.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도 그걸 국운상승의 기회로 이용하는데 미흡했던 우리로서는 절박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서울올림픽 성과를 국가이미지 높이기 및 우리 사회의 선진화에 제대로 접목시키지 못했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올림픽기간에 드러난 우리의 역량이 끝난 뒤의 일상에 제대로 녹아들지 않은 데 있었다. 일과성 태풍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이번 월드컵 성공이 우리에게 준 메시지 중에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았던 것들일 뿐이다. 따라서 흥분으로 들뜬 마음을 이제는 차분히 가라앉히고 냉철한 눈으로 길게 내다보며 추진해야 한다.

히딩크 감독이 우리에게 보여 준 팀 운영방침은 간단하다. 지연 학연 혈연 등 파벌과 비리를 완전히 도려낸 새로운 바탕 위에서 능력 위주로 사람을 기용하며, 한번 세운 목표를 향해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고 초지일관한 것이다. 감독과 선수는 공정성에 기초한 신뢰감으로 뭉쳤고 난관에 부딪히면 히딩크는 인내와 유모어로 돌파했다.

지금 너도나도 히딩크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각 기업들은 물론 정부부처들까지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포스트 월드컵 대책을 마련한다고 야단이다. 정치인과 정당들 역시 뒤질 새라 북새통이다.

그러나 그렇게 떠드는 이들이 고질이 된 정실과 파벌, 비리를 하루아침에 내던지고 공정하고 합리적인 세상에 필요한 능력과 참된 모습을 보여줄지 의심스럽다. 포스트 월드컵 대책을 너무 시끄럽게 떠드니 '관료와 정치인, 당신들이나 잘 하라. 다른 분야는 가만히 놔 둬도 된다' 는 사회 일각의 야유에 박수를 보내는 이들이 많다. 자칫하면 그 지긋지긋한 전시행정이 또 기승을 부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표현이다.

'붉은 악마'를 계기로 우리 사회의 여러 금기가 타파되고, 분단국 국민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제한된 사고의 틀에 변화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것도 개개인의 생활과 의식 속에서 체질화되어, 좁고 치우쳤던 우리의 시야를 넓히도록 해야 한다. 지금까지 고향, 학교, 피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배척하며 우리 스스로를 가두던 배타성 폐쇄성도 걷어 내야 한다. 히딩크 감독의 메시지는 공정하고 투명한 세상, 열린 사회를 만들고 자신감에 찬 당당한 자세, 넉넉한 마음으로 나라 안팎을 상대하라는 주문이다. 그리고 나와 다른 견해는 말할 것도 없고 비난까지도 귀기울여 들을 줄 아는 아량과 다양성을 요구하고 있다.

축구의 성공과 함께 IT강국의 면모를 세계에 알리는데도 최대 효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해 지속적인 연구 개발의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면 금방 다른 나라에 덜미를 잡히고 만다.

이번 월드컵은 기발한 묘책으로 성공을 거둔 것이 아니다. 다 아는 방법을 히딩크감독이 실천하고, 기성세대보다 훨씬 유연한 사고를 하는 젊은 세대가 우리의 잠재 에너지에 불을 당겼을 뿐이다.

따라서 포스트 월드컵의 방향은 간단하다. 월드컵 성공이 보여준 지극히 상식적인 것들을 국민 개개인, 기업, 정부가 일상에서 내면화하고 조용히 실천해 나가면 된다. 정말 해낼 수 있는가. 조용히 나부터 자문해 보자. 각자의 대답에서 국운상승 여부는 판가름날 것이다.


- 격주간 '새마을운동' (2002.07.04)


-----
박연호
http://columnist.org/ynhp

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http://columnist.org

[칼럼니스트]를 이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