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7월 3일 No. 467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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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날

    종교나 신화에 바탕을 둔 서양의 대부분 축일들과 달리 한국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명절은 거의 다 농경문화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농사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산업화 이후 농업의 비중이 줄어들고 있듯이 특정 명절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잊혀지거나 사라지고 있다.
   반세기 전만 해도 꽤 큰 명절이었던 대보름 단오 동지 등이 이제는 거의 자취를 감췄는가 하면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설과 추석도 그 분위기가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 농촌이 쇠미해져 노인들만 사는 쓸쓸한 곳이 되어 가고 있는 추세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럼에도 복날만은 상대적으로 강세를 떨치고 있다. 다양한 원인과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핵심은 복날과 관련한 음식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 명절들은 그에 맞는 독특한 음식이 있다. 다 알다시피 설에는 떡국, 추석에는 송편이 대표적인 음식이며 동지는 팥죽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복날은 단연 개고기다.
   예전에는 명절이 돌아오면 그 별미의 음식들이 축제 분위기를 한층 돋구어 주었다. 그러나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떡국 송편 팥죽 등은 별미의 특권을 차츰 잃게 되었다. 사람들의 입맛도 크게 달라졌다.
   이에 비해 보신탕은 즐기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 준비 과정이나 비용이 그리 수월한 것이 아니어서 상당히 벼르지 않으면 먹기 힘든 편이다. 그 때문에 복날을 은근히 기다리며 입맛 다시는 인구가 많아지는 것 같다.
   원래 복날이 개와 관련은 있지만 그 고기를 먹는 것은 부차적이었다. 복날에 관해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일컬어지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에 보면 덕공(德公) 2년(BC 677)에 처음으로 복일(伏日)을 정하고 개를 잡아 열독을 제거했다고 되어 있다. 즉 개를 대문에 달아매고 사람을 해치는 뜨거운 열기를 물리친다는 주술적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걸 먹는 것은 제사 지낸 뒤 그 음식을 나누어 먹는 절차의 하나에 불과했다. 후대에 와서도 보신탕은 더위를 쫓는 여러 음식 중 하나였을 뿐이다. 지금처럼 복날 하면 보신탕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경향과는 달랐다.
   그래서 다른 기록들에서도 개고기와 연관된 기사는 드물다. 후한(後漢)의 유희(劉熙)가 편찬한 사서(辭書) '석명(釋名)' 은 일종의 어원사전인데 여기에 복날에 대한 설명이 있다. 오행설로 볼 때 가을의 서늘한 금(金)기가 여름의 더운 화(火)를 두려워하여 복장(伏臟; 엎드려 감춘다)한다는 뜻에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음양오행설에 따라 매년 하지 이후 셋째 경일(庚日)이 초복이며 열흘 뒤인 넷째 경일이 중복이다. 그리고 입추 후 첫 경일을 말복이라 한다. 그러나 해에 따라서 중복과 말복 사이가 20일 간격이 되기도 하는데, 이를 월복(越伏)이라고 한다. 올해는 하지인 6월21일 이후 셋째 경일인 7월11일(경진일)이 초복, 7월21일(경인일)이 중복이며 입추(8월8일) 이틀 뒤인 10일(경술일)이 말복이 된다. 중복과 말복 사이가 20일이므로 월복이다.
   1년중 가장 더운 기간은 태양으로부터 열을 가장 많이 받는 하지가 아니라 하지 이후 약 50여 일이다. 삼복은 바로 여기에 들어 있다. 일년 중 가장 뜨거운 이 기간에 옛 사람들은 농사일과 더위로 지치고 각종 질병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복날을 기해 몸을 보하는 여러 가지 음식을 취하고, 건강을 지키기 위해 각종 피서 활동을 벌인 것이다.
   진(秦)·한(漢)이후 복일이 되면 조정에서 육미(六米)를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민간에서도 여름철의 식욕감퇴를 방지하기 위하여 육식을 하였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열전 중 동방삭(東方朔)전에 보면 복날이 되어 궁중에서 신하들에게 고기를 하사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도록 대관승(大官丞. 황실의 음식물 공급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직책)이 나타나지 않자 동방삭이 칼을 빼 자기 몫을 베어 낸다. 복날이라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하는데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겠느냐면서 고기를 가지고 혼자 퇴근해버린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이를 지켜 특히 백제에서 설과 추석 다음으로 복일과 납일( 臘日.동지후 셋째 미(未)일)을 지켰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종묘에 피, 기장, 조, 벼 등을 올려 제사를 지내고 각 관청에 여름의 특별 하사품으로 얼음표를 나누어주었다. 이를 받은 관리들은 얼음을 저장한 국가기관인 동빙고나 서빙고에 가서 얼음을 받았다. 개 잡아먹는 것이 풍속인양 되었으나 그건 서민들의 일이었고, 사대부집안에서는 쇠고기를 얼큰하게 끓인 육개장을 개장국 대신 먹었고, 그 외에도 삼계탕, 계절과일 등을 넉넉히 먹어 더위에 지친 몸을 보하였다. 일반 서민들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마련, 산간계곡으로 들어가 발을 물에 담그며, 해안지방에서는 바닷가 백사장에서 모래찜질을 하면서 더위를 이겨냈다. 또 금이 화에 굴하는 것을 흉하다 하여 복날은 씨앗 뿌리기, 여행, 혼인, 병의 치료 등을 삼갔다.
   이처럼 복날은 농업이 주산업인 시대 경제와 국민건강 보호를 목표로 한 큰 명절이었다. 그만큼 복일에 대한 조정의 관심도 매우 컸다.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조선조 때 기록 '응천일록'(凝川日錄) 인조 6년(1628년)7월17일자에 보면 관련 기사가 나온다. 당시 사헌부에서 임금께 이렇게 아룄다. " 근래 일관이 직무를 태만히 하고 역서를 만들 적에 전념하지 않아 복일에 이르러서도 중국의 역서와 대소가 같지 않으니 중한 것에 따라서 추고하소서." 이에 임금이 답하기를 '우리나라 복일은 전부터 중국과 같지 않으니 거기에 뜻이 있는 듯하다. 다시 잘 살펴서 논하는 것이 옳다"
   사헌부는 중차대한 복날이 중국과 다를 때가 있으니 관련자를 엄중 문책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금은 예전에도 다른 바가 있었으니 무조건 처벌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잘 따져서 합당한 결론을 내리라고 한 것이다. 이는 복날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과 가끔 날짜 계산방법의 차이로 중국과 다른 때도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복날은 이처럼 민관이 함께 한 전국적인 피서 행사였다. 우리 명절들이 대체로 쇠퇴하고 있는 가운데 복날이 활성화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 본뜻을 살려 새롭고 건전한 피서축제로 발전시켜 나간다면 오늘에 맞는 새로운 휴가 문화 정착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 캐주얼 라이프 닷넷 여름호 (2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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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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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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