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6월 29일 No. 464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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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이루어진다

서너살이나 됐을까.얼굴에 태극 문양을 그린 붉은악마 차림의 두 어린이가 뚫어지게 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월드컵 준결승전 다음날인 26일 대한매일 1면 사진이다. 상암동 서울월드컵 경기장에서 벌어진 한국과 독일 경기 관람에 열중한 어린이들을 찍은 것이었다.신문 지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이 사진 밑에는 “꿈은 계속된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고,사진설명 제목은 “내일 은 우리가…”였다. (->대한매일 2002년6월26일 1면 보기)

나도 그 어린이들처럼 붉은악마 옷차림으로 상암동 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준결 승전에 12번째 선수로 ‘참여’했다.경기가 끝나고도 응원석이 텅 빌 때까지 앉아 있다가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고 아쉬움과 뿌듯함이 교차하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잠자리에 들었다.그러나 아침 신문에서 이 사진을 보는 순간 한국이 독일에 0대 1로 진 아쉬움을 가볍게 떨쳐낼 수 있었다.“그래 적절한 시점에서 잘 멈춘 거야.이번 경기도 연장전이나 승 부차기까지 가고,그래서 우리가 이긴다 해도,다음 경기에서 우리 선수들이 경기장에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어.그동안 죽 을 힘을 다해 몸이 부서져라 뛰었으니….한꺼번에 무리하게 이루는 것보다 4 년 후를 기다리지 뭐.”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린 순간 스스로를 달랬던 심정 으로 다시 돌아갔다.

사실 한국 축구의 폴란드전 첫 승만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결승 진출 좌절을 아쉬워한 것은 우승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한국 선수들이 일본 요코하마 경기장에 서는 것을 보고 싶은 소망에서였다.“‘아시아의 긍지’ 가 된 한국 축구를 일본이 열렬히 응원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하 는 생각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번 월드컵 대회에 남북한 단일팀이 뛰었다 면 남북 통일은 훨씬 앞당겨질 텐데.”하는 꿈까지 가졌던 것이다.

동북아 질서의 재편에 대한 기대가 무너진 데서 온 아쉬움과 교차된 뿌듯함 은 우리 선수들과 응원단이 안겨주었다.한국 선수와 응원단은 너무나 순수하 고 평화스러웠다.거스 히딩크 감독은 지난 5월 “한국 선수들의 강한 열정과 순수함이 나를 들뜨게 한다.이들은 월드컵을 단순히 돈벌이로 여기는 유럽 선수들과는 크게 다르다.”고 말한 바 있는데,6월 한달 내내 우리 선수들은 온 국민과 세계인에게 히딩크의 그 발언을 감동적으로 확인시켜 주었고 이날 준결승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붉은악마의 응원 모습을 먼 발치나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본 사람들에겐 그 거대한 에너지 분출과 일사불란함이 섬뜩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그러나 그 붉은 물결 속에 들어가 보면 평화로운 열정에 ‘생애 최고의 감동’(미국 칼 럼니스트 토머스 플레이트)을 맛보게 된다.아직도 그 물결 속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나는 3,4위전 때를 놓치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준결승전이 끝나고 경기장 밖에서는 진기한 풍경이 벌어졌다.독일 응원복을 입은 한 독일인이 작은 나팔로 ‘대∼한민국’을 선창하고 붉은악마 차림의 한국인과 외국인들이 이를 따라 목청껏 연호하는 모습이었다.노약자와 어린 이는 들어갈 수도 없을 만큼 축구 팬의 난동이 극심하다는 공포의 유럽 축구 장에서 주최국이 패배했을 때 상상이나 할 수 있는 모습인가.

물론 한국의 놀라운 승리를 ‘음모론’으로 깎아내리는 외국 언론도 없지 않다.인종차별의 냄새가 나는 그런 주장이 2006년 독일 월드컵 대회에선 더 이상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정부의 포스트 월드컵 대책이 발표 됐지만 월드컵 경기장 사후 활용대책의 재점검도 필요하다.10개 개최도시가 이미 마련해 놓은 대책은 수익사업 위주이고 축구경기장으로서의 상시 활용 계획은 미흡한 편이다.

뉴욕타임스는 “한국은 결승에 나가지 못했으나 세계에 자신들의 정신을 과 시했다.”고 썼다.그렇다.우리는 월드컵 우승보다 더 값진 것을 얻었다.붉은 악마의 준결승전 카드섹션대로 “꿈★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 했다.또 우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꿈을 이루는가를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우 리는 꿈을 이루었고 앞으로도 이룰 것이다.


- 대한매일 '임영숙 칼럼' 2002.06.28

임 영 숙
http://columnist.org/ysi
대한매일 미디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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