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6월 3일 No. 453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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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두뇌의 짐

     지인(知人) 한 분은 명민하고 유능하며 선량할 뿐만 아니라 성실하기 그지없는데 일에 몰두하다 가끔 약속을 까맣게 잊는다. 티가 있다고 옥이 아니랴. 그런 단처(短處)를 잘 아는 주변 인물들은 만날 당일 그에게 재차 알리는 수고를 마다 하지 않는다.
     기억의 휘발에 대비하는 방법은 기록이다. 그 기록은 '불망기'(不忘記) 또는 '비망록'(備忘 錄)이라 했던 것인데, 서양바람을 타고 '메모'가 되었다. 메모라면 생각나는 것이 옛날 '고등 국어'에 실린 이하윤의 '메모광'이란 글이다. 그는 "즉흥적인 시문(詩文), 밝은 날에 실천하고 싶은 이상안(理想案)의 가지가지"가 머리 속에 떠오를 때마다 이런저런 종이들에 메모한다. 그리고 그 메모들을 분신처럼 아끼고 보관한다.
     메모하는 것은 두뇌의 부담 일부를 종이에 위임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휴대용 컴퓨터나 전자수첩이 그런 목적에 이용된다. 개인 일정표를 제공하는 웹사이트도 여럿 있어 한 군데를 정하고 아침마다 열어 보면 편리하다. 종이가 맡던 기억 보관을 이제는 전자기계가 맡아 해 준다.
     앞에서 말한 지인처럼 공사다망하지 않고, 이하윤 시인처럼 멋진 문구가 무시로 머리 속에 피어나지 않지만, 꼭 가 봐야 할 곳과 때를 잊지 않으려고, 나는 두뇌가 져야 할 기억의 짐 일부를 기계에 맡긴다. 그러다 보니, 점점 기계에 의존하는 기억의 양이 늘어난다. 이러다가 컴퓨터나 전자수첩이나 웹사이트가 차지한 기억의 양만큼 내 뇌수가 비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이하윤 시인은 "쇠퇴해 가는 기억력을 보좌하기 위하여, 나는 뇌수의 분실(分室)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했지만, 상대하는 것이 종이가 아니라 전자두뇌라면 말이 좀 달라질지 모른다. 기계에 너무 쉽게 나를 맡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이따금 든다.


- 벼룩시장 2002.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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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문

http://columnist.org/parkk
칼럼니스트
전 대한매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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