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6월 1일 No. 451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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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리텍트'

‘아가리텍트’란 말이 있다. 건축가들 사이에 쓰이는 속어다. 입의 비속어인 아가리와 건축가를 뜻하는 영어단어 아키텍트의 합성어다. 이 말 속에는 건축가로서의 능력은 없으면서도 입심으로 행세하는 건축가에 대한 경멸이 은근히 스며 있다.

우리 문화계 각 분야에는 이런 ‘아가리∼’들이 꽤 많다.예술가로서 재능이 없으면서도 자신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더 대접을 받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특히 평론이 활발하지 못한 분야에서 그들은 주도적인 흐름을 만들기까지 한다.‘아가리∼’가 득세하는 현상은 문화계에만 국한되지도 않는다.

조선조 말의 화가 오원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취화선’으로 올해 제5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임권택 감독은 그런 예술가들과는 정반대 지점에 서 있다.어눌한 그는 말 보다는 작품으로 일어선 사람이다. 그래서일까.‘취화선’의 장승업은 자신의 그림에 문기(文氣)가 없고 속기(俗氣)가 많다는 비난을 받자 이렇게 분노한다.“문자향,시서화 삼절?히히히… 좋아하시네. 니미럴…야!꼭 제발이 붙어야 그림이라더냐? 그림은 그림대로 보기 좋으면은 끝나는 거야.꼭 그림 안되는 새끼들이 거기다 시를 써 놓고 공맹을 팔아서 세인들의 눈을 속여 먹을라구 그러는 거야. 씨부랄!”

고아 출신의 머슴으로 오로지 그림만 잘 그려 궁궐의 도화서에까지 들어가지만 그 자리마저 박차고 나와 예술혼을 담금질하는 장승업과 임 감독은 많은 부분이 겹쳐 보인다. 중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임 감독은 영화판의 밑바닥부터 시작해 최고의 국제영화제로 꼽히는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의 영예를 안았다.‘취화선’의 장승업이 마음에 차지 않는 자신의 그림을 찢고 불태우듯이, 임 감독도 “80년대 이전 영화들은 내게 원죄 같은 것”이라며 돈벌이만을 생각하며 만들었던 상업영화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싶다”는 심정을 피력한 바 있다.

‘아가리∼’의 허망함을 너무 많이 보았기에 나는 그런 ‘원죄’위에 서 있는 임 감독을 오히려 신뢰한다. 매일 매일 새로워지고자 했던 장승업처럼 임감독은 속기를 바탕으로 한 끊임없는 자기혁신을 통해 자기만의 문기를 이루어 냈다.그 문기에 칸영화제의 심사위원들은 매료된 듯 싶다.

칸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것은 “세계 영화문화의 구도속에서 한 나라의 영화를 상급에 진입시킨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영화평론가 유지나씨는 말했다. 그뿐인가.‘취화선’은 한국 상품의 국제 경쟁력도 높일 것이다.“21세기는 문화경쟁력이 기업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했던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지난 96년 대우가 프랑스의 톰슨사를 인수하려 했을때 톰슨 노동자들이 반발했던것은 한국의 문화적 이미지가 약한 탓이었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는 전통예술 뿐만 아니라 오늘의 영화·미술·문학인들의 활동을 외국에 알리는 문화수출 전략을 충고하기도 했다.

기 소르망의 충고를 그대로 따른다면 미술 분야에서는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씨가 국제적인 명성을 이미 떨치고 있으므로 이제 한국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노벨문학상은 우리에게 아직도 ‘먼 그대’인 듯 싶다.한국 문단에는 임 감독처럼 국제 무대에 널리 알려진 작가도,세계 7위 규모라는 영화시장과 같은 상업적 활기도 없다. 한국 작가들의 문학적 성취와는 별개의, 언어 장벽과 전략 부재에서 비롯된 상황이긴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다.

결국 한국의 국가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데는 당분간 영화계와 임권택 감독에게 계속 기대할 수 밖에 없다.월드컵의 열기에 묻히는 듯하지만 사실 임 감독의 칸영화제 수상은 월드컵 16강 진출에 못지 않은 쾌거다.

“내 나이가 황금종려상을 욕심 낼 나이가 아니다”고 말했다지만 그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또 보여줄 것으로 믿는다. 이번 수상으로 영화제에 대한 강박감에서 벗어나 “아무 부담 없이 자유롭게” 영화를 만든다면 ‘영화제를 위한 영화’라는 국내 일부 비난에서도 자유로운 영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이제부터다.


- 대한매일 '임영숙 칼럼' 2002.06.01

임 영 숙
대한매일 미디어연구소장
서울칼럼니스트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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