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5월 25일 No. 447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 딴 글 보기 | 손님 칼럼 | 의견함 | 구독신청/해지 | columnist.org |
전보가 사라져버린 우체국

신세대들 가운데는 「전보」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꽤 있을 것 같다. 친인척이나 지인의 경조사 때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뜻을 멀리서 전하는 통신수단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면 많이 아는 편이라고 하겠다. 더군다나 경조전보, 즉 축전(祝電)이나 조전(弔電)을 직접 보내본 적이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그러나 필자와 같은 50대나 그 이상의 세대들에게 전보는 매우 친숙했던 것이어서 젊은 세대들이 전보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과는 사뭇 다르다. 대부분 전보에 대해 아주 특별한 느낌을 갖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일종의 향수 같은 감정이라고 해야 할지….

50·60대 나이의 사람들은 전보와 관련해 아련한 추억과 함께 저마다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이 갖고 있다. 특히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서울유학생들은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향토장학금」으로 하숙비를 내고 남은 약간의 용돈으로 한달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 워낙 빠듯한 액수여서 친구들과 어울려 막걸리라도 왕창 마시고 나면 빈털털이가 되기 일쑤였다.

수중에 돈이 떨어졌으니 갓 배운 담배조차 사서 피울 형편이 안돼 꿍꿍 앓아야만 했다. 이렇게 며칠씩이나 참고 참다가 찾아가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우체국이었다. 지방의 부모님에게 돈을 부쳐달라는 내용의 전보를 치기 위해서였다. 시외전화는 워낙 비싸 하숙집의 것을 빌려쓰거나 전화국에 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우체국에 들어가면 우선 몇 글자를 보내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다. 될 수 있는 한 글자 수를 적게 해야 요금이 덜 들었기 때문에 머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 용건을 지극히 간명하게 만들어야 했다. 문장력이 좋은 사람이 만든「모범답안」을 그대로 베끼기도 했다.

전보내용은 책값을 빨리 송금해달라는 것이 가장 많았다. 부모님들로부터 용돈을 더 타내는 길은 책값을 핑계로 하는 것이 가장 확실했다. 물론 책을 살 생각은 아예 없었고 담배값과 당구비와 같은 용돈이 필요하니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의 행사비용이 필요하다거나 몸이 아프니 약값을 보내달라는 내용도 적지 않았다. 아마 당시의 많은 부모들은 자식으로부터 날아온 전보내용이 「거짓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모르는 체하고 송금을 해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모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전보는 군대생활을 할 때도 매우 요긴하게 쓰이는 통신수단이었다. 주로 긴급상황이 발생했을 때였다. 특히 조부모가 돌아갔을 때나 위독할 때 이른바 「관보(관청에서 보내는 전보)」를 이용했다. 부대에서는 이런 관보가 오면 해당 사병에게 일정기간의 휴가를 보내주었다.

당시는 사회에서 군부대에 전화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집안에서 생긴 급한 일을 부대에 있는 자식에게 가장 빨리 알리는 방법은 바로 전보였다. 그런데 개인의 이름으로는 전보를 칠 수 없고 동사무소 같은 관공서에서 보내야만 가능했다. 그래서 관보(官報)라는 이름이 붙었다.

관보 가운데는 역시 할아버지나 할머니 사망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버젓이 살아 계시는데도 비상한(?) 재주를 부려 집에서 관보를 치도록 한 뒤 휴가를 가는 사병들도 많았다. 하도 이런 일이 많다보니 어떤 사병은 제대할 동안 "할아버지, 할머니를 여러 번 죽였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심지어 버젓이 살아있는 아버지, 어머니를 사망시키는(?) 일도 예사로 있었다.

전보라고 하면 우선 매우 빠르다는 것이 나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선입견이다. 사실 전화를 빼고서는 전보처럼 빠른 것도 없었다. 전화비보다 훨씬 적은 경비로 이쪽에서 필요한 내용을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전보는 오랫동안 서민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통신수단의 하나였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전보를 두고 「서민의 파발마」로 부르기도 했다. 그 전보가 인터넷시대를 맞아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고 한다. 사용하는 사람들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전화나 인터넷으로 순식간에 나의 의사를 상대방에게 보낼 수 있는데 전보는 속도가 느린데다 내용도 많이 담을 수 없으니 푸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싱가포르에서는 지난달 30일 인도로 보내진 결혼축하 전보를 끝으로 서비스가 중단됐다고 한다. 이동전화와 인터넷 등 첨단 통신수단의 발달로 전보에 대한 수요가 급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이 남의 나라 얘기로 끝나지 않을 듯 싶다.

우리나라에 전보가 도입된지는 1백년이 훨씬 넘는다. 정확하게 말해 1884년 우정총국이 세워진 다음해인 1985년부터 전보가 사용됐다. 이때부터 80년대 중반 「1가구1전화시대」가 열리기 전까지는 가장 인기 있는 통신수단이었다. 그런 전보가  인터넷을 통한 전자우편(e메일)에 밀려 퇴출 당할 위기를 맞고 있다.

자료에 따르면 지난 75년의 전보이용 건수는 6천5백만건이었으나 99년에는 2천만건 이하로 크게 줄었고, 지난 한햇동안은 9백70만건에 지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접수요원수도 당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전보의 전성기이던 70년대 중반 서울지역에만 7백∼8백명이 있었으나 현재는 겨우 130여명으로 줄었다.

우체국에서 일반적인 내용의 전보를 접수하는 업무는 이미 지난 97년부터 중단됐다. 그런데도 이런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우체국에서 "책값을 보내달라"는 전보를 보내던 일도 이미 옛추억이 되고 말았다.

다만 경조전보는 우체국이나 인터넷(www.epost.go.kr)을 통해 보낼 수 있다. 한국통신(KT)의 서비스안내전화 115나 인터넷(www.i115.co.kr)에서도 경조전보에 한해 서비스를 해주고 있다.  

서민들에게는 너무나 긴요했던 전보. 그래서 많은 추억거리를 만들어주었던 그 전보가 첨단시대를 맞으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음은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해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익숙한 것들과 이별하고 새로운 것들에 빨리 적응하는 지혜라고 하겠다.

--------------
이재일
칼럼니스트
전 월간 인터넷라이프 편집인.편집국장

2002.05.25
-----

http://columnist.org

[칼럼니스트]를 이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