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5월 21일 No. 445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 딴 글 보기 | 손님 칼럼 | 의견함 | 구독신청/해지 | columnist.org |
"너희가 우리를 아느냐"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노인복지센터 앞. 이른 아침부터 노인들이 길게 줄지어 있다. 출근 시간 때면 지하철 3호선 안국역의 가파른 계단을 노인들이 숨가쁘게 올라간다. 빨리 도착해 줄을 서야 복지센터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점심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 이용자는 3,800여명이지만 무료급식은 2,000명분에 불과하다.
    노인복지센터는 서울시에서 옛 통계청 건물을 개·보수해 마련했다. 지난 가을에는 '너희가 우리를 아느냐'라는 주제로 노인들이 직접 짓고 쓴 시, 그림, 서예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설익은 작품들이지만 우리시대 노인들의 명암을 읽을 수 있었다. 복지센터에는 온돌방, 휴게실, 노래방, 체력단련실, 도서관 등의 편의시설이 많아 갈 곳 없는 노인들의 쉼터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현재 전국에는 5만여 곳의 경로당이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다. 우리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값진 노인복지 인프라다. 하지만 말이 '경로(敬老)'지 잠시 여가를 보내는 공간에 불과하다. 정작 노인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은 갖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노인들은 벼랑 끝에 몰려 있다. 노인상담 전문 시민단체들의 조사결과 가정에서 학대받는 노인들이 계속 늘고 있어 가정의 달과 어버이날이 무색할 지경이다. 지난 1년간 폭언이나 트집 등 노인학대 상담전화에 접수된 학대건수만도 498건이다. 더욱 안타까운 건 학대를 받아도 자식들이 불이익을 당할까봐 참고 지내는 노인들이 많다는 점이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2030년에는 65세 이상 노인이 1천만명을 넘어서는 등 고령화 문제도 심각하다. 현재 10명의 청·장년이 노인 한 명을 부양하지만 17년 뒤에는 청·장년 5명이 노인 한 명을 먹여 살려야 할 때가 온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비율은 이미 2000년에 7%를 넘어섰다. 유엔 기준으로 볼 때 노인층 증가의 부작용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는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것이다. 지금 추세라면 2019년엔 그 비율이 14%에 달해 노인 문제가 국가 전반을 압박하는 고령사회가 된다. 세계에서도 가장 빠른 고령화 속도다.
    수명은 늘어나는데 직장에서 축출당하는 연령이 계속 낮아지고, 핵가족화의 진전으로 가정에서도 설 땅이 좁아졌다. 이런 절박한 상황인데도 우리는 30∼40년 전에나 맞는 경로당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기존 경로당을 '실버클럽'으로 전환하고 일거리 창출과 연계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의 개발이 절실하다.
    고령화 사회에서는 일거리 창출이 가장 시급한 과제다. 일본은 고령화 사회가 되기 7년 전에 노인복지법을 제정했다. 1995년에는 고령사회대책기본법을 만들어 취업, 능력개발, 취미활동, 개호(介護) 등에 이르기까지 노인대책에 적극적이다. 늙어서도 일하고 싶어하는 것은 돈 때문만은 아니다. 건강을 지키고 사회활동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의 노인대책은 늦어도 너무 늦었다. 정부와 정치권은 기본적인 정책 방향조차 수립하지 못한 채 뒷짐을 지고 있다. 노인 복지예산도 전체의 0.37%에 불과하다. 중앙부처의 노인정책 인력·조직 역시 초라하기 짝이 없다. 정부는 노인 문제에 대한 종합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노인 일자리 창출이다. 노인 고용 창출만이 사회부담을 줄이는 가장 확실한 대안이다.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참신한 아이디어로 노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있다. 구직 희망 노인과 구인기업을 연결시켜주는 노인전문인력은행을 운영하여 실효를 거둔 곳도 있다. 한학에 능통한 노인들이 서당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문·예절교육을 할 수 있도록 주선한 지자체도 있다. 또 교육계 퇴직자들을 공부방. 어린이집. 청소년 프로그램 상담교사로 활용하는 곳도 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일자리 창출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정 연령이 되면 임금을 줄이거나 비정규직으로 바꿔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임금 피크제'를 도입해 고령자의 일자리가 줄어들지 않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호주에서처럼 고령자를 채용할 때 인센티브를 주고 해고할 때 불이익을 주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방안도 추진할 필요가 있다.
    고령화시대에서는 나이보다는 능력을 우선하는 형태로 사회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이를 위해 채용. 배치. 고용 때 나이를 이유로 차별화하지 못하게 연령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 담배인삼공사(2002.05.17)

-----
이규섭
Florist Meister Schule 기획이사
시인 ·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http://columnist.org
[칼럼니스트]를 이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