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5월 11일 No. 439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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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의 고향 고창

    판소리는 우리민족의 정서와 멋과 풍류가 어우러진 민중음악이다. 판소리엔 민족의 서정성과 해학, 애환이 스며있다. 외래문화의 홍수속에서도 우리의 소리를 아끼고 보전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자긍심을 키우는 일이다. 가장 한국적이 것이 가장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필자는 1994년 '국악의 해'에 판소리 명창들의 고향과 독공(獨功) 터를 찾아 그들의 삶과 소리세계를 탐구한바 있다. 판소리 유파에 따라 계보를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동편제 탯자리 송흥록 명창의 고향인 전남 남원군 운봉면 비전마을을 시작으로, 수로(水路)를 따라 형성된 중고제의 금강권과 서해안, 동·서편제가 강물처럼 유장하게 흐르는 섬진강 영산강 보성만 일대를 휘모리 가락으로 누볐다.
    한 시대를 풍미한 쟁쟁한 명창들이 많지만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1812∼1884)선생은 판소리 명창이 아니라 조선후기 판소리 사설을 정리한 이론가다.
    신재효에 대한 초기 연구가인 이병기·강한영은 신재효가 모순투성이였던 판소리 사설을 합리적이고 사실적으로 개작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에 근거하여 영국의 셰익스피어에 비견된다며 극찬했다. 이에 대해 김홍규·인권환은 신재효가 추구한 합리성이 판소리사적으로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평가의 초점을 맞추어 신재효는 합리성이라는 잣대로 판소리 문학이 지니고 있는 생명력, 곧 민중들의 발랄한 반중세적 지향을 거세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고창 모양성 앞에 동리 사랑채
    후세 학자들의 엇갈린 평가에도 불구하고 신재효가 판소리 부흥에 기여한 공로는 크다. 그가 정리한 판소리 여섯 마당은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와 흥부가인 '박타령' 수궁가인 '토별가' '변강쇠가''이다. 그 중 '변강쇠가'는 억압된 성의 표출이라는 긍정적 평가도 있으나 가사가 너무 음탕하다는 부정적 시각 때문에 소리꾼들이 부르기를 꺼려하여 다섯 마당만이 전해지고 있다.
    전북 고창읍에 가면 동리 선생의 고택인 사랑채가 남아 있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동리국악당을 모양성(牟陽城)앞에 건립해 놓았다. 모양성으로 불리는 고창읍성(高敵邑城)은 읍성이면서도 읍을 둘러싸지 않고 산성처럼 되어 있는 자연석 성곽이다. 병이 없어지고 오래 산다고 하여 윤달이 드는 해는 부녀자들이 찾아와 성 밟기를 하는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다.
    동리국악당은 1990년에 문을 연 600평 규모의 매머드 건물로 500석의 공연장, 동리기념관, 연습장을 갖추고 있으며 동리대상(桐里大賞)을 제정하여 해마다 시상하고 있다. 그 곳에는 국악 꿈나무들이 판소리와 가야금을 배우고 고수(鼓手)반엔 대학생 일반인들이 장단을 밀고 당기며 가락을 익히고 있다.
    동리국악당 너른 마당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이엉 덮인 돌담장안엔 초가 한 채가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중요 민속자료 39호로 지정된 신재효의 사랑채다.
   당시에는 안채를 포함한 크고 작은 여러 채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으나 지금은 초가지붕인 사랑채만 남았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일자형이며, 북향으로 배치되어있다. 사랑채 뒤편에는 원래 연못이 있었으나 매워지고 그 자리에 고창경찰서가 들어섰으며, 사랑채는 일제시대 때 경찰서 관사로 쓰였다고 한다. 우물 옆 담장 밑엔 신재효가 지은 '동리가비(桐里歌碑)'가 오석에 음각되어 있다.
    '고창읍내 홍문거리/ 두충나무 무지개 안/ 시내우에 정자 짓고/ 정자 끝엔 포도 시렁/포도 끝에 연못이라…'
    그의 '자서가(自敍歌)' 가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동리는 자신이 거처하는 연당(蓮堂)앞에 시냇물을 끌어들여 정자를 지어 놓고, 광대들에게 가사를 바로 잡아주고 음률을 다듬어 주었다.
   
    훈훈한 인간미 기리는 '휼민비'도
    그의 집이 어찌나 컸던지 암행어사 어윤중은 고창 현감 더러 "신재효집 기둥이 관아의 것보다 크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중인출신의 신재효의 재산이 넉넉했던 것은 시쳇말로 유산이다. 그의 아버지 신광흡(申光洽)은 경기도 고양 사람으로 고창현의 한양 일을 대신해주던 종7품의 중인계급인 경주인(京主人)이었다. 광흡은 고창현에서 관약방(官藥房)을 운영하는 등 중인출신으로 재산을 모았다.
    동리는 선친이 남긴 재산과 후광을 등에 업고 소리꾼들의 후원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1876년(고종13년)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 기민구휼(飢民救恤)에 앞장서 곳간의 양식을 풀어 이웃에 나눠주는 등 마음 씀씀이도 넉넉했다. 경복궁 낙성식 때는 오백냥의 헌납전(獻納錢)을 내기도 했다. 그의 인간애를 기리는 휼민비(恤民碑)가 고창읍 하거리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강한영 박사가 발굴, 현재 모양성 안에 옮겨놓았다.
    동리가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게 된 계기는 당시 소리꾼들의 사설이 부르는 이들마다 제각각이고 내용 또한 투박하고 노골적인데다 아귀가 맞지 않아 정리하면서 개작했다. 그는 중인신분인 호장(戶長)으로 평소 양반들에 대한 열등의식이 많았으며 자아실현의지가 강해 그가 지은 가사와 시조 밑바탕엔 비판의식이 진하게 깔려있다.
    동리는 소리꾼이 아니라 듣고 비판하고 가르치는 '귀명창'이다. 그래서 독자적인 판소리 유파를 형성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판소리 사설이 지녀야할 음악적 요소를 도외시하여 현장감이 약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결국 그의 판소리 사설은 소리판에서 불렸던 사설에서 독서물로 이행하는 중간과정인 서사문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
   
    광대는 인물 사설 득음 연기력 갖춰야
    동리가 지은 '광대가'는 광대의 경전이라 할 만큼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광대 행세 어렵고 또 어렵다/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치례/ 둘째는 사설치례/ 그 지차 득음이요/ 그 지차 너름세라…'
    신재효는 광대가 되려면 인물, 사설, 득음(得音), 연기력인 너름새를 갖춰야 한다고 네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그의 집 열네 칸 줄행랑에는 기녀와 창부들로 붐볐고, 뒷날 국창으로 이름을 떨쳤던 이날치 박순만 정창업 김창록 등이 그 곳을 거쳐갔다.
    신재효를 언급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여류명창의 효시 진채선(陳彩仙)이다. 지금이야 여류명창이 수두룩하지만 판소리 200년사에 여류명창 출현은 처음이다. 대원군은 경복궁 경회루 낙성식 축하연에 전국의 소리꾼들을 불렀다. 이때 동리는 채선을 그곳에 보내 자신이 지은 '성조가' '방아타령' 등을 부르도록 했다. 홍일점이었던 그의 소리를 들은 대원군은 격찬하며 채선을 운현궁에 머무르게 했다. 당시 운현궁에는 '대령기생'이라 하여 이름난 기생들을 머물게 했는 데 채선도 거기에 끼여 총애를 받았다.
    신재효는 곧 돌아올 줄 알았던 채선이 돌아오지 않자 연정을 담은 유명한 '도리화가(桃李花歌)'를 지어 채선에게 보냈다.
    '스물 네 번 바람불어 만화방창 봄이 되니/ 구경가세 구경가세 도리화 구경가세/ 도화는 곱게 붉고 희도 흴사 외야꽃이 향기쫒는 세요충은 젓대북이 따라가고…'
    '도리화'는 진채선을 뜻하며 '스물 네 번 바람불어'는 채선의 나이를 나타낸다. 그때 신재효의 나이 쉰 아홉. 채선을 향한 그리움은 이렇게 이어진다. '…잠 못 들어 근심이요/ 꿈 못 이뤄 전전한다…/ 언제나 다시 만나 소동파를 불어볼까.'
    그 후 동리는 진채선의 추천으로 대원군으로부터 오위장(五衛將) 벼슬을 받아 중인의 멍에를 벗고 양반 반열에 끼게 되었다.
    민중의 예술인 판소리를 민족문학으로 승화시킨 신재효는 1884년(고종 21년) 73세를 일기로 판소리의 요람인 그의 사랑채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고창군 천북면 옥동(현 성두리) 동남쪽 내동산기슭에 묻혀있다.

-산재의료관리원 사보(봄호·200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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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Florist Meister Schule 기획이사
시인 ·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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