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4월 20일 No. 427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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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버리지 못한 레드 컴플렉스

    소피아 로렌의 '해바라기'를 1970년대 한국에서는 한동안 상영하지 못했다. 일부 배경이 공산국가 소련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주한미군 TV에서 이를 몇 차례 원본대로 방영, 볼 사람은 다 본 뒤에야 몇 장면을 삭제하고 상영허가가 나왔다. 자유당 말기에 제작한 국산영화 '오발탄'도 얼마 동안 창고에서 낮잠을 자야 했다. 주인공의 노모가 치매에 걸려 입만 열면 '가자'고 한 말이 북한으로 가자는 뜻이라며 상영을 불허했던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보면 어처구니없고 우스워 보일지 모르지만 그 때는 그랬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험난한 세월을 지나왔고, 그 여파는 지금도 도처에 상존하고 있다. 그 당시는 '해바라기'나 '오발탄' 같은 영화의 상영을 주장하면 영락없이 '빨갱이'로 의심받던 살벌한 세상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 낙인은 본인뿐만 아니라 집안 전체의 사회적 매장을 뜻했다. '해바라기, '오발탄' 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었다. 빨갱이 덫은 숲 속의 칡넝쿨처럼 사회 곳곳에 뻗쳐 있어서 자칫하면 걸리고 넘어지게 되어 있었다.
    남북이 분단된 데다 참혹한 전쟁까지 치렀으니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건 아무도 시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 재발 가능성에 두려움을 느끼고 북한에 대해 공포심을 갖는 건 당연했다. 이 같은 공산주의에 대한 과민반응을 적색공포증 또는 레드 컴플렉스(red complex)라고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를 충분히 연구하고 우리의 힘을 더욱 길러야 했다. 그러나 역대 독재 정권과 기득권 층은 공산주의 위협을 실제 이상으로 과장하고 왜곡시켜 공포심을 유발하고 그걸 근거로 무자비한 인권 탄압을 정당화했다. '레드 콤플렉스'를 확대·재생산하며 체제안정과 정적 탄압의 수단으로 악용한 것이다.
    조선조 5백년간 성리학에 갇혀 우리의 정신세계는 매우 좁아지고 균형마저 잃어버렸다. 중국과 일본이 성리학은 물론 그에 반대되는 양명학 등을 수용해 활발하게 발전시킨 것과는 대조적이다. 해방 뒤 우리는 또다시 다른 쪽은 입에 올리기만 해도 죽음으로 몰리는 극단의 비정상적 현실을 살아오면서 사상적 불균형을 면치 못했다.
    21세기는 세계화 시대다. 그런 것들을 털어 버리고 세계의 큰 흐름에 합류하여 과거의 부진을 만회해야 할 때인데 그 진입조차도 힘겨운 상황이다. 요즘 선거판에 또 등장한 색깔론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과거의 유물인 레드 콤플렉스가 박물관으로 가지 않고 아직도 그 용도를 과시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정권을 담당하겠다는 이들의 이념논쟁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하지만 그건 건전한 정책대결 차원이어야지 대안 없는 중상 비방이어서는 안 된다. 국민의식 수준도 예전에 비해 많이 성숙했다. 사이비 이념논쟁을 즐기는 이들은 이제 새롭고 건전한 방향으로 물꼬를 틀어 우리의 정신세계 균형회복에 일조해야 할 것이다.


- 인재제일 3.4월호 (2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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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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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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