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2002년 4월 14일 No. 424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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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번호들과의 씨름

정보화사회를 살아가자면 비밀번호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해야할 만큼 비밀번호는 우리생활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쓰고 있는 비밀번호는 적게는 3∼4개에서 많게는 20∼30개에 이르고 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대표적으로 쓰고 있는 비밀번호가 은행과 관련된 것들이다.  예금통장마다 비밀번호가 있으며, 그 통장에 따른 현금인출카드에도 비밀번호가 있다. 특히 폰뱅킹이나 인터넷뱅킹을 할 경우 은행마다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통장계좌번호와 주민등록번호에다 통장계좌비밀번호, 계좌이체비밀번호, 지급계좌비밀번호 등을 입력해야 송금 등의 일이 가능하다.

이밖에 각종 신용카드, 백화점카드에도 당연히 비밀번호가 있다. 휴대전화까지 비밀번호를 쓴다. 문자메시지를 읽거나, 잠금장치를 위해서이다. 이 뿐이 아니다. 버튼식으로 된 현관이나 가게문의 열쇠와 자전거열쇠에도 비밀번호가 있다. 이러다 보니 우리들이 써야하는 비밀번호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 주체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비밀번호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쓸 일이 많다는 뜻이 된다. 컴퓨터가 생활필수품이 돼버린 지금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컴퓨터를 켠 뒤 e메일을 확인하거나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기 위해 ID와 함께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있다.

직장에서도 비밀번호를 쓸 일은 계속된다.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역시 컴퓨터를 켜게 되는데 이때도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돈이 필요해 은행에 간다면 역시 현금출금기 앞에서 나만의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돈을 인출한다. 은행에서 쓰는 비밀번호는 대부분 컴퓨터에서 쓰는 것과는 다른 것을 이용한다. 같은 번호를 쓴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비밀번호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 결코 과장된 말로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비밀번호라는 것이 이름그대로 남들이 알 수 없는 나만의 것이면서 기억하기 좋은 것이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외우기 쉬운 비밀번호는 남들이 눈치챌 우려가 많고, 남들이 알아보기 힘든 번호를 정하면 내가 외우기 어려워진다. 더구나 비밀번호가 한 두개면 몰라도 자신도 모르게 많아지다 보니 잠깐 소홀히 했다가는 잊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비밀번호야 말로 정하는 단계에서부터 사용하는 데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주는 존재가 되고 있다.

비밀번호를 잊었을 경우 다소 복잡한 절차를 거쳐 새로운 비밀번호를 만들어야 한다. 이 같은 불편을 겪지 않으려면 단단히 기억을 해둬야 한다. 인터넷의 경우 자주 찾는 사이트의 비밀번호는 별 걱정이 없지만 가끔 들르는 사이트는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애를 먹기도 한다. 각 사이트는 회원의 비밀번호나 ID를 찾아주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놓고 있지만, 끝내 비밀번호를 찾지 못해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은행의 각종 통장도 마찬가지다. 통장마다 같은 번호를 쓰면 혹시 사고가 났을 때 한꺼번에 피해를 입을 수가 있음을 걱정해서 각기 다른 번호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 또한 외우기가 만만치 않다. 어떤 사람들은 잊어버릴 경우를 대비해서 수첩 같은 곳에다 적어 놓지만 혹시 남이 알게될까 봐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가끔 신문에서는 남의 신용카드를 훔친 뒤 주민등록번호 등에서 힌트를 얻어 비밀번호를 알아내 현금인출기 돈을 빼냈다거나, 인터넷에서 해킹을 통해 남의 비밀번호와 ID를 알아낸 뒤 그 사람의 이름으로 주식거래를 하여 큰 손해를 입혔다는 등의 기사가 보도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비밀번호를 쉽게 정했거나 관리를 엉성하게 하고 있는 사람들은 행여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고 걱정을 하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비밀번호가 여러 개 필요한 폰뱅킹을 하는 동안 "비밀번호를 바꿔라"는 안내음성을 들을 때는 고민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오랜 기간 폰뱅킹에 쓰던 비밀번호를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가 그 뒤 생각이 나지 않아 은행까지 찾아가서 설명을 한 뒤 또다시 다른 것으로 바꾼 경험이 있다.

지난 80년대 중반 필자가 은행현금카드를 처음 갖게 됐을 때의 비밀번호는 군대생활을 할 때 쓰던 군번 맨 마지막 4자리 숫자였다. 또 다른 카드는 주민등록번호의 맨 마지막 4글자였다. 들키기 쉬운 번호 때문에 낭패를 본 일은 없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의 비밀번호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할 때였다. 그 번호는 은행카드와 함께 나의 지갑에 들어있던 주민등록증에 적혀 있는 것이었다. 만약 누가 나의 지갑을 훔쳐 은행카드를 쓸 때 주민등록번호나 주민등록증에 적혀있는 군번(당시에는 주민등록증에 군번이 있었음) 중의 맨 마지막 4개의 숫자를 입력하면 얼마든지 돈을 빼낼 수 있었던 것이다.

10여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나 군대시절에 썼던 군번, 생일 따위에서 비밀번호를 만드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요즘은 은행에서 아예 주민등록번호나 전화번호를 비밀번호로 이용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니 다행한 일이다.

비밀번호는 대부분 심사숙고하던 끝에 다소 외우기 어렵더라도 남이 알아내기 힘든 것으로 정하게 되는데 기억력의 한계 때문에 비밀번호를 잊게 되는 불상사가 자주 일어나게 된다. 이렇게 되자 비밀번호를 한 두개로 통일하거나 자기만의 노하우로 비밀번호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비밀번호를 관리해주는 인터넷사이트까지 있다. 그러나 이것에도 비밀번호가 필요하다. 만약 이 사이트의 비밀번호를 잊어버린다면…. 역시 우리들의 걱정을 완전히 덜어주지는 못하고 있다. 비밀번호를 껴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인 모양이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번호」는 이를 엿보거나 훔치려 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비밀번호를 철저히 지키면서 아무런 탈없이 사용하는 사람만이 정보화사회를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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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일
칼럼니스트
전 월간 인터넷라이프 편집인.편집국장

2002.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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