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발행
칼럼니스트 2002년 3월 30일 No. 415
COLUMNIST 1999.09.19 창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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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국가는 유토피아인가

「유토피아(Utopia)」는 영국의 정치가이며 인문주의자인 토머스 모어(1478∼1535)가 1516년에 쓴 정치적 공상소설의 제목이다. 이 소설은 작가가 히스로디라는 선원으로부터 이상(理想)의 나라 유토피아의 제도·풍속 등을 들은 것을 기록하는 형식으로 이상사회를 묘사한 작품이다.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시민이 교대로 농경에 종사하며, 노동시간은 6시간이다. 필요한 물품은 시장의 창고에서 자유로 꺼내 쓸 수 있다. 소설의 내용은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종교적 관용 ·평화주의 ·남녀교육의 평등 등을 주장하고 있다. 근대소설의 효시로 간주되며 사회사상사적으로도 고전으로 여겨지고 있다.

처음에는 라틴어로 쓰여졌으나 저자가 사망한 뒤인 1551년 영역판이 간행됐다. 이 책의 제목 「유토피아」는 그리스어의 「없는(ou-)」과 「장소(toppos)」라는 두 말을 결합하여 만든 것으로, 「좋은(eu-) 장소」라는 뜻을 연상하게 한다. 그래서 「아무 데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이 본뜻이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이상향(理想鄕)’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됐다.

불교에서도 유토피아와 비슷한 말이 있다. 완전에 도달한 상태를 의미하는 바라밀(波羅密)이 그렇다. 바라밀은 대해탈, 대자유, 무한능력, 대조화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진리본연의 경계를 말한다. 그래서 바라밀은 인간에게 있어서 궁극의 이상향이며, 영원한 생명의 본고향이다. 불교에서는 바라밀이야말로 인간이 마땅히 이르러야 할 곳이며, 생명이 근거하고 있는 근본바탕이라고 말하고 있다.

티베트어인 「샹그리라」라는 말도 「언덕 저쪽」이라는 뜻으로 히말라야지역의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향을 뜻한다. 그들은 샹그리라에는 삶의 고통이 없고 병들고 죽는 생사윤회가 없으며 배고픔과 부자유의 얽메임이 없다고 믿고 있다.

우리나라 제주도 사람들도 오래 전부터 남쪽 바다에 「이어도」라는 곳이 있다고 믿어 왔다. 이어도는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나 아들이 있는 섬으로, 그곳에서는 힘들여 일하지 않아도 먹고 입고 마실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이어도는 이상향인 셈이다.

최근 인터넷 가상국가인 「라도니아(Ladonia)」에 많은 파키스탄인들이 이민을 희망하고 있다는 소식이 외신으로 전해졌다. "인터넷을 통해 북유럽국가의 시민권을 무료로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이 파키스탄 전역에 퍼지면서 문의가 쇄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실체가 없는 가상의 나라인데도 실재하는 이상향인 것으로 잘못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라도니아는 스웨덴의 설치미술가 라슈 빌크스라는 사람이 1996년 스웨덴 남부 해안가 1㎢ 정도의 영토(?)에 세운 인터넷 가상국가(Net Country). 빌크스는 해안가에 설치한 자신의 대형 추상조형물을 정부당국이 이를 철거하려 하자 이 일대 토지를 매입하고 그해 6월2일 라도니아를 세웠다.

가상국가라고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다. 국기와 국가는 물론 입법·행정·사법부와 법무·국방·외교·보건 등 26개 행정부처도 있다. 인터넷선거로 국회의원을 선출하기도 한다. 현재 시민권자수는 5천6백여명으로 대부분 스웨덴과 덴마크 등 북유럽 사람들인데 누구나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으며, 12달러만 내면 귀족신분도 얻을 수 있다.

라도니아당국은 한달 사이에 3천여건에 이를 정도로 인터넷접속이 폭주하자 대책회의를 열어 "라도니아는 직업과 주택을 제공할 수 없으며, 비자 역시 발급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을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라도니아 공식 홈페이지에서 이뤄지는 모든 행위는 잠시 답답한 일상에서 탈출하는 여행이다." 라도니아의 창설자이자 국무장관인 빌크스의 말에 고개 끄덕여진다.

라도니아와 같은 사이버국가는 인터넷사용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부터 세워지기 시작해 현재는 수백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이름이 알려져 있는 가상국가도 많다.

웨스터 버지니아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조 코메티가 세운 베르고니아로 북대성양에 있는 가상의 섬나라이다. 이름은 텔레비전 영화 「슈퍼맨」에 나오는 허구의 국가에서 따온 것이다. 메사추세츠주의 밥슨대학에 다니는 존 알렉산더 카일이 세운 프리도니아는 화폐(은화)도 만들어냈다. "오! 프리도니아, 구원의 땅 프리도니아, 프리도니아 사람들은 결코 노예가 되지 않으리"라는 후렴을 가진 국가도 있다.

아에리칸제국은 상상력이 풍부한 나라 가운데 하나이며, 주민들은 「그레이트 펭귄」을 숭배한다. 이 사이트는 독자들에게 "아에리칸은 어리석음을 아주 중요시한다. 바보같은 짓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제한된 입국만 허용된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국기도 있다. 또 슬로베니아의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만든 가상국가 NSK는 정치적 사이트로 유명하다. 이 사이트의 선언서는 "NSK는 고정된 영토, 국경주의를 부정하면 초국가적 법을 주창한다"고 공표하고 있다.

호주의 화가 리즈 스털링이 1996년에 세운 리즈베키스탄은 3년 뒤인 1999년 9월9일 그녀가 사이트를 파괴시키기 전까지는 가장 인기 있는 가상국가였다. 전성기에는 「리즈벡 센티널」, 「더 디펜던트」등 신문이 4가지나 발행됐고 시민도 수천명에 이르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처럼 인간들이 이상향을 꿈꾸는 것은 현실에서의 고달픈 삶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의 표출이라고 하겠다. 그 것이 비록 실현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런 꿈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우리 인간들에게 큰 위안이 되는 것이다. 인터넷시대를 맞아 사이버공간에 가상국가를 세우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다. <200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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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일
칼럼니스트
월간 인터넷라이프 편집인.편집국장

2002.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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