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발행
칼럼니스트 2002년 3월 29일 No. 414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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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름발이 서예

    한문학 박사과정을 밟던 어느 고교교사가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서예도 배우고 싶어 한 서예학원에 등록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약 한 달 뒤부터 그 학원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다. 예전에 붓이라곤 잡아 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단 그가 가르치는 것은 서예가 아니라 한문 해독이다. 서실에 나가 보니 초보에서부터 각종 전시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사람 등 상당한 수준에 있는 이들까지도 한문 내용은 거의 모른 채 글자를 그리고 있었다. 더욱 기막힌 노릇은 그 학원을 운영하는 원장도 비슷한 실정이었다. 이름을 대면 알 사람은 다 아는 대가이니 한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료 수강생들과 그런 문제를 얘기하다가 말이 나온 김에 당신이 틈을 내 좀 가르쳐 주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와 일주일에 두어 시간 정도 사서(四書)를 강독하기 시작했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한문교육 쇠퇴로 일반인들이 한자를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하는 것이 놀랄 일이 아닌 세상이지만 명색 서예를 한다는 사람들까지 그렇다면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다른 서예인에 따르면 이는 서예계 전반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다른 서예학원을 몇 년 다녔는데 거기도 수강생은 물론 원장이 거의 까막눈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한문 학원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한문 학원 수강생들 중에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은 것을 알았다.
    서예인구가 통칭 1백만을 돌파한지 몇 년 되었다. 그리고 날이 다르게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그 근본이 이처럼 돼 있질 않으니 같은 한자문화권으로 서예를 하는 나라 사람들 보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예전에는 한문 문장과 시를 직접 구사하고 어려서부터 쓰는 교육을 했다. 오늘날 그 정도는 안 되더라도 최소한 글자를 읽고, 그 뜻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권우 홍찬유 선생 같은 노 한학자는 늘 이런 실정을 개탄하며 교육당국은 말할 것도 없고 서예인들 스스로가 자성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예는 점과 선·획(劃)의 태세(太細)·장단(長短), 필압(筆壓)의 강약(强弱)·경중(輕重), 운필의 지속(遲速)과 먹의 농담(濃淡), 문자 상호간의 비례 균형, 혼연일체 속에서 미묘한 조형미를 이루어 낸다. 그런데 무슨 내용의 글인지도 모르면서 쓰기만 하면 이런 조형미를 창출해 낼 수 있을 것인가. 같은 새 조(鳥)라도 아침 새와 저녁 새 울음이 다르듯이 글의 내용에 따라 글자 모양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뜻은커녕 읽을 줄도 모르고 글자만 그려놓으면 그게 예술로서의 격을 갖출 턱이 없다.
    최근 추사체 글꼴을 개발한 소프트웨어가 나왔다. 거기서 뽑아 쓰면 훨씬 훌륭한 추사체 작품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걸 서예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쓰는 이의 혼과 숨결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모르고 그리기만 한 오늘의 서예도 그런 점에서 별로 나을 게 없다.


- 충대신문 870호(2002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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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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