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발행
2002년 3월 7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No.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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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의 노예를 거부하라 슬로푸드 운동

    조미료와 간장, 라면 등의 광고가 라디오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1960년대, 당시 뜻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음식들이 전 국민의 입맛을 획일화할 것이라고 걱정했으나 이에 귀기울인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반세기도 채 안 된 지금 맥도널드 햄버거,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등 막강한 패스트푸드(Fast Food)와 각종 인스턴트 식품이 거의 모든 가정의 식탁을 점령, 미각의 세계화를 강요하고 있다. 당시의 걱정은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았음을 단칼에 보여준 것이다.
    패스트푸드와 인스턴트 식품의 장점이 없는 건 아니다.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보다 시간을 절약해주고 생산성 제고에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로 인한 피해가 너무 커 전형적인 소탐대실(小貪大失), 즉 작은 것을 얻고 큰 것을 잃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 패스트푸드 때문에 건강을 해친 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또 이런 식품들이 사람들 성격을 과격하고 폭력적으로 만든다고 한다. 인간의 어리석음이 스스로를 이 지경까지 몰고 온 것이다. 그 뿐인가. 세계 곳곳의 전통음식이 사라지고 각 지역 고유 농산물이 자취를 감추었다. 100년 전에는 사람들이 100∼120가지 음식을 만들어 먹었는데 지금은 평균 10∼12가지 먹을거리를 만든다니 그 폐해가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그나마도 조리를 하는 게 아니라 기계부품을 짜맞추듯 조립해 낸다.
    이에 대항하여 출범한 것이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이다. 1986년 이탈리아의 브라 지방에서 시작한 슬로푸드 운동은 현재 영국, 한국, 미국, 일본 등 40여 개 국에 7만 여명의 유료회원을 가진 세계적 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들은 선언문을 통해 우리가 그 동안 속도의 노예가 되었으며, 좋은 습관을 망가뜨렸다고 지적한다. 또 가정의 사생활이 침해당하고 패스트푸드를 먹도록 하는 빠른 생활, 즉 음흉한 바이러스에 우리 모두 굴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느긋하고 푸근한 물질이 주는 즐거움을 확고히 지키는 것이야말로 널리 퍼진 바쁜 생활의 어리석음에 반대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한다.
    19세기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우리가 먹는 것이 바로 우리다"라고 했다. 서양판 신토불이(身土不二)적 견해라 하겠다. 원정중인 조조군 병사들이 이유 없이 시름시름하자 고향 흙을 급히 운송해서 그 냄새를 맡게 하니 모두 원기를 회복했다는 일화 역시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이 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 아닐 수 없다.


- 웹진 '인재제일' 1,2월호 (20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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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칼럼니스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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