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발행
2002년 3월 3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No.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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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길은 바쁜데 해가 짧다

    '철마야 너 왜 입을 다물고 /잡초 속에 쓰러져 누웠느냐 /벌떡 일어나 우렁차게 울어 /이 적막한 하늘을 뒤흔들어라 /지금 곧 북으로 북으로 /냅다 한번 달리자꾸나.' 노산 이은상은 임진강 철교 남쪽 도라산 풀숲에 녹슨 채 누워있는 철마를 보고 기적을 울리라고 노래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떠오른 도라산역(都羅山驛)은 남방한계선 700m 아래 지점에 위치해 있다. 서울역으로부터 55.8km 지점이고 평양까지는 205km 거리다. 이 역은 당초 DMZ(비무장지대)에 복원키로 했던 장단역이 취소되면서 남쪽의 문산역과 북쪽의 봉동역 사이에 신설됐다. 지난 설에는 처음으로 실향민을 태운 망배열차가 운행되기도 했다.
    도라산은 신라 1,000년 사직을 고려 왕건에게 바치고,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와 결혼한 경순왕의 한(恨)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낙랑공주는 마음이 우울했던 경순왕을 위로하기 위해 이 산에 암자를 지었다. 경순왕은 아침저녁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경주)을 그리며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도라산이라고 불렀다는 유래도 애닲다.
    도라산역을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방문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경의선 철도 침목 위에 "이 철로가 한국의 (이산)가족들을 이어주기를 바란다(May This Railroad Unite Korean Families)"라고 쓴 뒤 서명했다. 현직 미 대통령이 비무장지대를 방문한 것은 1952년 6·25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비밀리에 최전방 지역을 비행기로 둘러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후 5번째다.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부시는 "미국이 (북한을)침공할 의도가 없다"고 천명함으로써 '악의 축' 발언 이후 조성됐던 한반도의 불안정성을 일단 걷어냈다. 햇볕정책을 지지하고 대화 국면의 기조를 열면서도 북한 정권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는 변화가 없음을 드러냈다. 부시는 북한의 대량 살상무기 및 재래식 무기의 위협 감소문제를 재차 제기했고 북한 주민들의 삶의 질을 외면한 북한 정권을 '악'으로 규정하면서 자유와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북한은 한·미 정상회담 이후 첫 공식반응을 통해 '부시 대통령의 발언은 중상 모독이자 대화 부정 선언'으로 규정하면서 미국과의 대화를 거부했다. 그러나 남북대화에 부정적인 언급은 하지 않아 대화재개의 수순(手順)을 선남후미(先南後美)로 잡아갈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감정적인 대응을 할 것이 아니라 하루 빨리 대화 국면을 여는 결단을 내려 한반도 정세의 안정화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정부도 일단 남북대화 재개에 힘을 쏟을 것이다.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 지원하는 중국산 옥수수 10만t의 북송을 시작으로 분위기를 잡아 갈 것으로 보인다. 쌀 제공과 비료지원도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특히 북측의 무성의로 미뤄진 4차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장관급 회담 재개 제의에도 무게를 둘 것이다. 춘궁기와 농사철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식량 및 비료지원을 받기 위해서라도 북한은 회담 테이블에 나올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다.
    문제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데 있다. 지방선거를 시작으로 월드컵 경기대회, 아시안 게임, 대통령 선거 등 일련의 정치 및 스포츠 행사가 줄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이후 남남(南南)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는 것도 걸림돌이다.
    부시 대통령의 방한 반대와 환영 시위는 국민 사이의 거친 반목을 실감나게 보여줬다. 국회는 '부시 대통령은 악의 화신', '이회창 총재는 악의 뿌리', '김대중 정권은 김정일 정권의 홍위병'이라는 여야의 극언 공방으로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표출시켰다.
    따라서 햇볕정책은 남남 갈등까지 해소할 수 있는 정책의 유연성과 포용성을 담아 나가야 한다.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을 감소시켰다는 점만으로도 햇볕정책의 역할과 의미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니 탄력성과 유연성을 상실하게 만든 결과를 가져왔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갈 길은 바쁜데 해는 짧다. 김대중 정부로서는 시간에 쫓기는 심정이겠으나 현 상황에서 햇볕정책과 남북 관계개선 노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내부적 안정 없이는 어떠한 대북 정책도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남남 갈등 해소 등 산적한 국내 현안을 해결하는 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일요서울 2002.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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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시인,칼럼니스트
일요서울 편집인 겸 편집국장
http://columnist.org 서울칼럼니스트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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