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발행
2002년 2월 10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No.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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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세배, 사이버 세뱃돈


이제 설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설날이 되면 친척들이 모여 차례를 지낸 뒤 윷놀이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오래 전부터 국민적인 놀이가 되다시피 한 고스톱을 즐기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 모르지만….

설날에 차례를 지내는 것은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차례를 지내기 위해 많은 정성을 들인다. 장을 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음식을 만드는 일, 그리고 차례상을 차리는 것 등 하나에서 열까지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차례상을 제대로 차리기도 여간 어렵지 않다. 棗栗枾梨(조율시이), 魚東肉西(어동육서), 左脯右 (좌포우해) 등 나름대로의 순서에 맞춰 진설(陳設)하는 일이 매년 하는 것인데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도 조상들에게 바치는 음식인 만큼 신중을 기하는 것이 차례를 준비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이렇듯 설날은 돈이 들고 번거롭기까지 해서 어른들에게는 고생스럽기도 한 날이지만 어린이들에게는 마냥 즐거운 날이다. 세뱃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자식이나 조카, 손자·손녀들로부터 세배들 받고는 덕담을 하면서 세뱃돈을 준다. 그러나 세배를 하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은 덕담에는 관심이 없고 세뱃돈에만 신경을 쓴다.

한바탕 어른들에게 새배하기가 끝나면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모두 얼마를 받았느니 하면서 서로 자랑한다. 어린이들이 어른들에게 받은 돈을 갖고 많고 적음을 따지는 것이 행여 잘못된 일이 아닌가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1년 3백65일 가운데 설날 하루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니 웃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사실 어른으로서는 오랜만에 만난 조카나 손자·손녀들에게 세배를 받고 세뱃돈을 주는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흐뭇하다. 세뱃돈을 주기 위해 일부러 은행에 가서 빳빳한 새 지폐를 미리 준비하는 일도 연중행사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왕이면 새 돈으로 주는 것이 세뱃돈을 받는 어린이들을 기쁘게 하는 일이기에 그렇게 한다.

그런데 조상전래의 이런 풍속도가 얼마가지 않아 변하거나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선 명절에 지내는 차례가 그렇다. 스키장이나 휴양지에 놀러가서 차례상을 차려놓고 차례를 지내는 것은 제법 오래된 일이지만 인터넷이용이 온 국민의 일상생활이 된다면 사이버공간에서 차례를 지내는 일이 예사로워질지도 모르겠다.

현실적으로 볼 때 형제들이 한국과 미국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면 부모나 조상의 기일에 함께 모여 제사를 지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사이버공간에서 차례를 지내게 되면 굳이 제사지내는 곳에 함께 모일 필요가 없어진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제사지내는 곳을 방문한 뒤 절을 올리면 되는 것이다. 절을 올리는 방법은 글로 고인의 명복을 빌거나 웹카메라로 자신의 모습을 비추면서 화면으로 절을 올리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바타를 만들어 절을 하는 모습을 연출(?)시키는 경우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이버차례는 결코 현실성이 없는 얘기가 아니다. 이미 사이버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으며, 사이버묘소까지 생겨났으니 사이버제사나 사이버차례가 보편화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시간과 장소가 마땅치 않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형제자매들이 한꺼번에 모일 수가 없다면 얼마든지 이 같은 일은 가능해진다.

모르긴 해도 제삿날(또는 명절)에 한쪽에서는 실제로 제사를 지내면서 사이버공간에는 제사지낼 곳을 따로 마련해놓고 직접 제사에 참가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곳을 방문해 고인의 명복을 빌 수 있도록 하는 가정도 있을 것이다. 서울과 지방은 물론 멀리 미국이나 유럽지역에서 떨어져 살고 있는 형제나 친지들이 굳이 한곳에 모이지 않아도 되니 참으로 편리한 방법이라고 하겠다.

사이버제사나 차례는 이처럼 편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면이 없진 않다. 그러나 형제자매나 친인척간의 왕래가 그만큼 줄어들면서 끈끈한 정도 자연히 멀어질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자주 만나지 않으면 이웃보다 못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차례를 사이버공간에서 지내게 되면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직접 세배를 받는 기쁨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이버로 세배를 받게 되니 세뱃돈도 현금이 아닌 사이버머니(전자화폐)로 주거나 온라인으로 송금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새 지폐를 바꿀 필요가 없게 돼 조금은 편해진 것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허전함을 달랠 수 는 없는 일이다.

이 세상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우리의 풍습도 점점 변화해가고 있다. 이러다가는 우리의 전통적인 세시풍속이 본래의 의미를 잃거나 아예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해본다. 조상들이 물려준 미풍양속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의 도리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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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일
칼럼니스트
월간 인터넷라이프 편집인.편집국장

2002.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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